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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49
한자 金萬德
영어음역 Kim Mand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허영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선사업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
성별
생년 1739년(영조 15)연표보기
몰년 1812년(순조 12)연표보기
본관 김해
대표관직 의녀반수

[정의]

조선 후기 제주의 여성 자선 사업가.

[가계]

본관은 김해. 증조부는 김성순(金性淳)이며 조부는 김영세(金永世)로 김응선(金應先), 김응남(金應南), 김응신(金應信), 김응열(金應悅)의 4형제가 있었다. 아버지인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高氏) 사이에서 2남 1녀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김만석(金萬碩), 김만재(金萬才) 두 오빠가 있었다.

[활동사항]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사별하고 외삼촌 집에 기탁되었으나 여의치 않아 기생 월중선(月中仙)에 보내져 11살에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김만덕은 관가에 나가 기녀 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과 판관 한유추(韓有樞)를 찾아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준다면 집안을 일으키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기녀 명단에서 제명받았다.

김만덕은 객주집을 차리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진 등을 서울 등지에 팔거나 기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 부녀자의 옷감·장신구·화장품 등을 염가로 공급하여 천 냥 부자가 되었다.

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정조 18)까지 5년간 제주에 흉년이 들어 제주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김만덕은 1천금을 내놓아 배를 마련하고 육지로 건너가 연해에서 곡물을 사들여 10분의 1은 내외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과 일부는 가족들에게 주었고,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로 보내어서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正祖)는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평민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김만덕에게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의 직을 제수하였다. 이후 영의정 채제공과 선혜청의 배려로 조선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김만덕에 대한 기록은 여러 자료에 전해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정조실록』과 체제공(蔡濟恭)의 『번암집(樊巖集)』에 들어있는 「김만덕전(金萬德傳)」이다. 이후 유재건(劉在健)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과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도 들어있다.

채제공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이라는 글을 김만덕에게 써주었으며, 당시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김정희(金正喜)김만덕의 양자 김종주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로운 빛은 길이 빛나리)’라는 글을 써주었다.

[묘소]

묘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6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387-4번지[사라봉길 75]에 김만덕기념관이 건립되었고 해마다 사회 봉사에 공헌한 제주도 여성을 선정해 만덕봉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또한 모충사에서 김만덕을 기리는 김만덕제를 거행하고 있다. 또한 2003년 11월에 김만덕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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