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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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嗜良殉敎碑 |
영어음역 | Kim Giryang Sungyo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Kim Giryang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영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성윤 |
성격 | 순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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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98년 |
관련인물 | 김기량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 |
소유자 | 천주교 제주교구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영평동에 세워진 김기량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
[건립경위]
김기량은 1855년 폭풍으로 표류하다 중국 광동 해역에서 구조되었다. 1857년 홍콩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게 되었다. 1858년 제주도에 돌아온 김기량은 전교 활동을 하였고 가족, 친척, 친구 등 20여 명을 입교시켰다. 그는 신앙생활 집단을 이끌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순교하였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8년 김기량의 순교비가 세워졌다.
[위치]
김기량 순교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 황사평 순교자 묘역 내부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제주시청에서 서귀포 방면으로 2㎞ 쯤 가면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아라중학교 쪽으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대화여객이 있고, 다시 우회전하여 1㎞ 쯤 들어가면 첫 번째 안내 푯말이 나온다. 여기서 1㎞ 쯤 더 들어가면 황사평 묘에 이른다.
[금석문]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은 이 고장 출신으로, 처음 영세 입교하여 이 땅의 복음화에 힘쓰다가 마침내 장엄한 순교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린 분이다.
함덕리 출신 어부였던 그는 1855년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까지 표류하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페낭(Penang) 신학교 조선인 신학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으로 세례를 받고 1858년에 귀국한다. 서울에서 페롱(Perong) 권 신부와 최양업(토마스)신부를 만나 교회 서적을 얻고 제주도에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온 그는 오로지 전교에 힘씀으로써 40여 명을 입교시킨다. 그는 이들을 보살펴 줄 신부의 파견을 베르뇌(Berneux) 장 신부에게 요청하여 승인을 받지만 병인박해로 좌절된다.
1866년 박해가 한창일 때, 새로 입교한 이들을 영세시키려고 육지부로 나가다가 통영 앞바다에서 관헌에게 체포된다. 모진 고문에 이어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처형으로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며 마침내 장렬한 순교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김기량은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하는 모범을 보여준 우리 신앙의 선조이다. 그는 이 고장에 신앙과 구원의 길을 영원히 밝혀줄 등불이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 순교비를 세우는 바이다.
1998년 9월 20일
[현황]
천주교 제주교구는 2005년 4월 24일 김기량의 고향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김기량 순교 현양비 제막식을 가졌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앞으로 그의 생가가 위치한 함덕리 지역에 대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내 시복 시성 주교 특별 위원회는 2003년부터 124위에 대한 시복 시성 사업을 교황청으로부터 전달받아 공식 추진하고 있다. 이 대상자 124위에는 김기량 순교자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