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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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拱辰樓 |
영어음역 | Gongjinnu |
영어의미역 | Gongjnnu Pavilion |
이칭/별칭 | 공진정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112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동전 |
성격 | 문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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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653년(효종 4) 3월 11일 |
측면칸수 | 3칸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1123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었던 조선 중기 북수구(北水口)의 문루.
[개설]
1652년(효종 3) 8월 심한 비바람으로 남수구와 북수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자,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그 해 겨울부터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3월 11일 북수구를 다시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워 공진루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 공진루는 관리들이 세운(世運)을 기원하는 장소로, 혹은 여름철 피서지나 외지에서 온 손님의 접대소 등으로 사용되다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고 전한다.
[변천]
이원진이 무너져 내린 북수구문을 다시 세우고 그 위에 문루를 올린 것이 1653년(효종 4) 3월 11일이었다. 이원진은 이 날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낙성 잔치를 벌였는데, 두보의 시구 중에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본다.”는 뜻을 따서 공진루라 이름하였다.
1808년(순조 8) 목사 한정운(韓鼎運)이 중수한 다음 ‘공진정(拱辰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공진정이 폭우로 다시 무너지자, 1831년(순조 31) 목사 이예연(李禮延)이 “물길이 가까워서 노는 사람들이 늘 북적거린다.”고 하여 삼천서당(三泉書堂) 북쪽으로 공진정을 이전하였다.
이 때 공진정 위에 초루(譙樓)를 지어서, 북두성을 바라보며 세운(世運)을 기원하는 사당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사와 관리들이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하였다. 또한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접대하는 장소로서도 활용하였다고 한다.
공진루는 1848년(헌종 14) 목사 장인식(張寅植)이 중건하고, 1884년(고종 21) 목사 심현택이 중수하였으며, 1904년(광무 8) 목사 홍중우가 다시 중수하는 등 여러 번 손을 보았다. 일제강점기 때 제주 측후소 부지가 되었다가 제주 신사를 지을 때 헐렸다.
[형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건물은 측면이 각각 3칸이고 퇴(退)는 없었다. 평면은 18자 방형이고, 축대 위에 세워진 합각지붕 집이었다.
[현황]
일제강점기 제주 신사를 지을 때 헐려 현재는 그 위치만 겨우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공진루는 관리들이 세운을 기원하는 장소로, 혹은 여름철 피서지나 외지에서 온 손님의 접대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제주 부임해 온 관리들의 생활의 일면을 엿보게 해주는 장소로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