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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080
한자 姜昌輔
영어음역 Kang Changb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69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창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69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2년(고종 39)연표보기
몰년 1945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대표경력 제주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위원|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책임자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강제원(姜齊元)이며 부인은 김윤성(金允聲)이다.

[활동사항]

김석익(金錫翼)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서울에 있는 중동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수료하였다. 1921년 제주도에서 반역자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에 나선 이래 평생 항일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1925년 송종현(宋鍾炫)·김택수(金澤銖) 등과 함께 제주도 최초의 사상 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이른바 ‘신인회 사건’으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8년 9월에 제주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위원 및 집행위원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송종현·김택수·장종식(張鍾植)·오대진(吳大進)·김정로(金正魯)·윤석원(尹錫沅)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1년 1월 출감하였다.

출감 후 제주도에서 다시 항일 투쟁에 나서 1931년부터는 이익우(李益雨)·신재홍(申才弘)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면서 세금 불납 운동, 묘목 강제 배포 반대 운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해녀 항쟁을 지도할 때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일명 제주공산주의자협의회) 책임자로 지목되어 일제에 검거되었으나 탈출하였다. 도피 생활을 하던 중 강병희(姜炳喜)의 도움으로 제주와 오사카 간을 운행하던 정기 여객선에 숨어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서도 항일 운동을 계속하여 도쿄에서 송성철(宋性徹) 등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4월 국내 잠입을 기도하던 중 도쿄에서 검거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년 1월 옥사하였다. 시신은 동생인 강창거(姜昌擧)가 마차로 제주도로 운송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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