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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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昌擧 |
영어음역 | Kang Changgeo |
이칭/별칭 | 강양일(姜良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69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나영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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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69 |
성별 | 남 |
생년 | 1910년 |
몰년 | 2004년 |
본관 | 진주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진주. 가명은 강양일(姜良一)이다. 아버지는 강제원(姜齊元)이며, 항일운동가강창보(姜昌輔)의 아우이다.
[활동사항]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25년 4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사 야나기다(柳田彦二)의 조선인 학생 차별에 항거하여 동맹 휴학을 하였다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하였다.
1925년 9월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고, 1927년 동맹 휴교를 주도하다가 일시 구속되었다. 1929년 1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하였고, 동년 3월에는 정관진(鄭寬鎭)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월까지 전라남도 목포에서 제주기선상회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1930년 5월 다시 서울로 갔다. 1931년 6월 중순경 정관진의 지도 하에 서울 창신동에서 경성세염회사 노동조합의 인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31년 7월 상순경에는 3~4회에 걸쳐 서울에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과 일제 지배 타도를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3월 김기범(金基範)·강위황(姜渭璜)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34년 9월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살았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 동대문구에서 살다가 1947년 2월 23일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지부를 결성하였고, 1949년 말경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06년 6월 25일 유해가 일본 오사카에서 국내로 봉환되어 신혁희·원재룡·박도백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합동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