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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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文一 |
영어음역 | Kang Muni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139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나영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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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1399 |
성별 | 남 |
생년 | 1911년 |
몰년 | 1967년 |
본관 | 곡산 |
대표경력 | 애월읍 인민위원회 간부|단국중학교 교사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활동사항]
어릴 때 2년간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22년 애월읍 신엄리에 있는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1년 동안 배웠다. 192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있는 금구소학교(金歐小學校) 야간부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전기제작소 공원으로 일하던 중 일본 공산당 당원 김귀영(金貴榮)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무산 아동에게 항일 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데에 박영순(朴榮淳)과 뜻을 같이 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박영순과 함께 하귀리 2구에 무인가 야학을 설치, 운영하였다.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하여 김홍규(金弘奎)·김을봉(金乙鳳) 등이 하귀리 1구에서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하였다.
통합 후 60여 명에 이른 학생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키기 위해 이천만가(二千萬歌)·혁명가·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쳤다.
1935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박영순·배두봉(裵斗奉)·김을봉·김홍규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애월읍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하였고, 1947년 3·1절 기념 시위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검거되었다. 석방 후 하귀리의 단국중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재임하던 중 좌·우익의 갈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