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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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簡易學校 |
영어음역 | gani hakgyo |
영어의미역 | temporary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었던 단기 초등 교육 기관.
[설립 배경]
1930년대 일제의 산미 증산 계획의 실패와 세계 경제 공황 등의 여파로 인해 계속적인 수탈을 당한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작쟁의 등 농민 저항 운동이 격화되었다.
또한, 한국인의 교육열은 크게 고조되어 간 반면 교육 시설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1932년부터 농촌 진흥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교육을 보급시키고 대륙 침략을 위한 동원 체제를 만들어 농촌 사회의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적은 예산을 들여 초등 교육을 보급시키고자 간이 학교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설립 경위]
일제는 농촌을 집중적으로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1934년 1월 학비(學秘) 제2호로 「간이 초등 교육 기관 설치에 관한 건」을 발표하였다. 단기에 일본어를 보급시키고 직업 교육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간이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간이 학교 경영 지침에서 교원에게 당부하기를 “당신은 환경상, 가정 형편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제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아동의 부친이라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국가는 당신에게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 가르침을 받은 아동들은 천황 폐하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이며 있어야 할 미래의 보배이다”라고 하였다.
[교육 목표]
「간이 초등 교육 기관 설치에 관한 건」에서는 “조선교육령 제4조 및 보통학교 규정에 준하되 특히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일본어를 습득하는 데 힘쓰고 동시에 지방 실정에 더욱 적절한 직업 도야에 둔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교육의 목표는 훌륭한 일본 국민이 되는 것이며 일본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직업 노동에 대한 이해와 능력을 제고하여 식민지 정책에 동화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체제]
간이 학교는 공립 보통학교에 부설되어 있었으나 독립된 교육 기관으로 인정하여, 자체의 교육 과정으로 초등 교육을 완성시키도록 하였다. 다만 공립 보통학교의 교장과 훈도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수업 연한은 2년제이고 학급은 단급으로 편성하여 평균 10세 정도의 아동들을 입학시켰다. 각 학년마다 40명씩 80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운영]
대부분 간이 학교의 운영은 관비로 충당되었으나 개량서당을 간이 학교로 개편하고, 서당 설립자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농촌 실습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교원은 한 학교에 한 명씩으로 하되 반드시 간이 학교가 있는 마을에 머물러 직업 도야에 힘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였다.
즉, 간이 학교의 교원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근무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촌락민을 계몽, 교육해야 하므로 일종의 촌락개학(村落皆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편, 간이 학교에 배치할 교원을 보충하기 위해 각 사범학교에 11학급씩을 임시 증설하여 주로 갑종 농업학교 졸업생들에게 1년의 단기 강습을 과한 뒤 간이 학교 교원으로 배치하였다.
[교육 내용]
교과목으로는 수신·일본어·조선어·산술·직업 등 다섯 과목을 가르쳤으며 1940년 이후 조선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수업 시간은 1주일에 30시간 이내로 하고 보통 교과와 직업 교과는 2:1의 비율로 시간을 배당하였다.
직업 과목에서는 농업을 가르쳤으며 학교마다 전답과 우사·돈사·퇴비장 등의 실습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다. 교과서는 도시 간이 학교가 보통학교용을 사용한 데 반해 농촌 간이 학교는 따로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였다.
[제주 지역의 간이 학교]
1934년 처음으로 애월면에 고성 간이 학교(古城簡易學校)와 서귀면에 서호 간이 학교(西好簡易學校)를 설립하였다. 1935년 성산면 난산리(蘭山里)에, 1936년 조천면 선흘리(善屹里)에, 1937년 한림면 금악리(今岳里)에, 1938년 제주읍 용담리(龍潭里)와 구좌면 송당리(松堂里)에 각각 간이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간이 학교 6곳을 더 증설하였다.
[변천]
한국인의 호응이 적을 뿐 아니라 1940년대부터는 민족 말살 정책이 적극화되어 더 이상 간이 학교 설립이 추진되지 않았다. 해방 후 간이 학교는 모두 6년제 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