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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와 성리에 걸쳐 있는 산. 가은산(加隱山)은 간신히 몸만 피난한다는 뜻으로, 달리 가음산(加陰山)이라고도 표기한다. 한편 가는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내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고할미가 나물을 뜯으러 왔다가 반지를 잃어버려서 온 능선과 골짜기를 샅샅이 찾아다니다가 아흔아홉 번째 골짜기에서 반지를 찾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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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비를 시조로 하고 유안례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세거 성씨.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후손으로, 송나라 때 병부 상서를 지낸 유전(劉荃)이 고려 문종(文宗) 때인 1082년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유씨(劉氏)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유전의 맏아들 유견규(劉堅規)의 후손들은 거창 유씨가 되었다. 한편 유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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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는 강수봉(姜秀鳳)이다. 시아버지는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계원(李啓元)이고, 남편은 이유봉(李裕鳳)이다. 강순희(姜順熙)는 18세에 청상과부가 된 뒤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나 지극한 정성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시동생 이유철(李裕喆)과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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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효자. 강준회(姜晙會)는 본관이 진주(晉州)이며, 효행이 남달랐다. 아버지가 병으로 혼절하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시켰고,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니 문득 큰 물고기가 뛰어 올라와 이로써 병을 다스렸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위독할 때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야생 학이 약이 된다고 하였는데, 홀연히 창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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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건물을 설계하고 짓는 예술, 또는 기술이 낳은 구축물. 건축(建築)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전통 건축은 동양 사상으로 집 우(宇)와 집 주(宙)의 우주관으로 성주괴멸(成住壞滅)하는 자연관의 결정체이다. 전통 건축은 시공간적으로 빈 공간의 허(虛)에서 우주와 합일하는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가 충만한 건축물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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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예부터 고인돌과 같은 큰 바위가 있어 고라미, 고래미, 고암이라고 하였다. 한자의 뜻으로 보아도 ‘옛 돌’이지만 이두식으로 읽어도 ‘고인돌’의 ‘고’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 제천군 현좌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도상리(道峠里)·운전리(雲田里)를 통합하여 제천군 읍내면 고암리가 되었고, 1940년 제천읍 고암리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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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과거 향교(鄕校)가 있던 곳이므로 향교골, 교동(校洞), 향미골이라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읍내면 읍부리(邑部里)가 되었고, 1917년 제천군 제천면 읍부리가 되었다. 1940년 제천면이 제천읍으로 승격함과 아울러 대성정(大成町)이 되었고, 1949년 동제(洞制) 실시로 대성정을 교동으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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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활산리, 청풍면 장선리, 봉양읍 구곡리에 걸쳐 있는 산. 국사봉(國思峰)은 조선 시대 충신 유안례(劉安禮)[1426~1506]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즉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 승하하자 유안례는 지금의 금성면 활산리 안살미에 살면서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동쪽 영월을 향하여 절을 하며 의리와 충성을 다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국사봉(國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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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회(聖會). 권형규(權亨奎)는 8세 때 어머니가 회충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다, 주변에서 닭 한 마리를 병자 방에서 굽고 꿩 한 마리를 다른 방에서 구운 다음, 닭과 꿩을 바꾸어 병자에게 먹이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눈 덮인 겨울 산에 올라 꿩을 구하러 다녔다. 숲 속을 헤매고 있는데 풀숲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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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김규환(金奎桓)은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를 넘기면서 탄환이 고갈되고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강화되면서 의병이 점차 수세에 몰렸는데, 1908년(순종 2) 여름 이강년이 청풍의 작성 전투에서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고 의병 진영이 흩어지자, 이강년과 함께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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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의 효자. 김남석(金南錫)은 본관이 강릉(江陵)이며, 지금의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에 살았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70세에 동맥 경화증에 걸려 병석에 눕자 극진히 봉양하였다. 그 모습을 본 면 사람들이 감동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960년 면장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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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명화(明火). 김병명(金秉明)[?~1896]은 제천시 금성면 동막리에서 살았다. 단발령 이후에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이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하였을 때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공략하고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군 주둔 지역을 공격하였는데, 특히 충주의 가흥에 자리 잡은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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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매(公梅), 호는 벽하(碧河). 원주 안창마을에 세거하던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자손이다. 김사정(金思鼎)[1869~1942]은 진사를 지냈으며, 1895년 단발령 이후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伯善) 등이 안창에서 의병에 가담하였을 때 사위인 이춘영을 매개로 하여 문중 대표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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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언형(金彦型)[1892~?]은 1920년 7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김덕선, 정호척, 김재현, 주효점, 지달하 등과 함께 대한독립신민단을 조직하였다. 본부는 노령에 두었으며 북간도 연길현 옹성패자명월구에 참모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신민단은 이민족 지배 반대, 국내외 자본주의 및 군국주의 타파, 계급 제도 타파, 빈곤 해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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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용준(金龍俊)은 경기도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출신의 의병으로 포군으로 활약하였다. 단발령 이후 이춘영(李春永), 김백선(金伯善) 등이 지평의 포군을 기반으로 의병을 처음 일으켰을 때 참가하였다. 나중에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활동하였다.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가흥, 수안보 등을 공략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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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김우경(金祐京)은 본관이 청풍(淸風)으로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서 살았다. 군대 해산 후 1907년(순종 1)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종군하여 금수산·청풍·단양 전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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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아버지는 효자로 동몽교관의 관직과 정려를 받은 김종려(金宗礪)이다. 김이중(金履重)은 아버지를 본받아 극진히 부모를 모셨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대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살폈고, 병이 깊어져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흘려 넣음으로써 회생시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피눈물을 흘리며 3년간 묘소를 지키는 등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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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아들로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김이중(金履重)이 있다. 김종려(金宗礪)는 본관이 강릉(江陵)이며,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어려서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종일관 지극한 슬픔과 예를 다하는 행동이 어른보다 나아 주변의 칭송을 들었다. 어머니를 봉양할 때도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쾌유를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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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정치인. 김종무(金鍾茂)[1908~1987]는 본관이 김해(金海)이며, 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1937년경 송학면장을 역임하였다. 노의중과 함께 제천주조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천부읍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회 쪽에서 반탁 운동에 참여하였고 군청 내무과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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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효부이자 효녀. 본관은 청풍(淸風). 남편은 김준구(金俊九)이고, 아버지는 김진학(金鎭學)이다. 아들로 김태희(金泰希)가 있다.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15세에 시집가서 일찍 남편을 여의고 남매를 두었는데, 낮이면 나무하며 김을 매고, 밤이면 길쌈과 바느질로 가난하던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친정 부모가 나이 들자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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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김준석(金俊石)은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군인 출신인 박여성(朴汝成)이 제천의 청풍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합류하였다. 주로 금수산과 단양 하일(夏日)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싸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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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열녀.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김진규(金振奎)의 처이며, 효행이 조정까지 널리 알려져 고종에게서 동몽교관의 관직과 정려를 받은 김이중(金履重)의 6세손 며느리이다. 남편이 병석에 누워 여러 해 일어나지 못하는 동안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며 크고 작은 집안일을 홀로 처리하였다. 남편이 세상이 떠나자 탄식하며 스스로 독약을 먹고 남편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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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해풍(海豊).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 김태원(金泰元)[1863~1932]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출사하여 별군직과 선전관청 선전관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있은 직후 김하락·구연영·조성학·신용희 등과 함께 이천에서 봉기할 때 선봉장을 맡았다. 백현(魄峴)·이현(梨峴) 등지에서 접전하여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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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와 한수면 덕곡리를 연결하는 고개. 꼬부랑재는 충주댐 수몰 전에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 골안[谷內]에서 덕산면 신현리 일명 ‘와룡산(臥龍山)’에 있는 고산사(高山寺)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또한 골안과 쇠시리재의 분기점으로 행인들의 이동이 빈번했으나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성천 변에 국도 36호선이 개설되면서 꼬부랑재는 방치되어 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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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남산에 있는 개항기 때 의병과 관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곳. 제천 남산은 제천 의병의 항일 정신이 깃든 격전지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 의병은 유인석(柳麟錫)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1896년(고종 33) 2월 17일에 충주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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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에 있는 산. 제천현 관아의 남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72년 간행된 『제천현지도(堤川縣地圖)』에 따르면, 제천현 관아 동헌의 아후봉에서 남쪽으로 제7남산(第七南山)을 표기하여 제7봉이 남산(南山)이었음을 알 수 있고, 산봉우리 앞 북쪽으로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봉우리를 관아 밖의 남산으로 인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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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마을에 남산약수터가 있어 남천동(南泉洞)이라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 한사리(寒寺里)[일명 한사동]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읍내면 화산리(花山里)가 되었고, 1940년 제천읍 화산리가 되었다. 1949년 화산리에서 갈라져 남천동이 되었고, 1995년 2월 16일 남천동 일부가 화산동에 편입되었다. 1995년 10월 30일 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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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제천과 충주의 깊숙한 곳에 고요하지만 한눈에 그 크기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호수가 생겨났다. 평화로운 듯 보이는 이 내륙의 바다를 제천 지역 사람들은 청풍호라 부른다. 청풍호의 고요한 물길 속에 잠긴 제천 지역 마을들은 모두 5개 면(面) 61개 리(里)에 달한다. 그러나 실제 물속에 잠긴 마을은 그보다 더 많다. 서서히 물이 들어오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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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주(光州). 호는 삼족당(三族堂). 노정하(盧楨夏)는 부모가 병이 들자 지성으로 보살폈으며, 병세가 심해지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며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다. 결국 상을 당하게 되었을 때 40리 길이나 떨어진 묘에 사흘마다 참배를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친족의 관혼상제에 후하게 도와주었으며, 친구들 사이에도 신의가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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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정월 14일 밤에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세시놀이. 다리 밟기는 정월 대보름 전날 해 지기 전 일찍 밥을 먹은 후, 15일 새벽까지 제천천 등의 내[川]에 놓인 다리 위를 지나다니는 대동놀이이다. 이를 다른 말로 ‘답교(踏橋) 놀이’라고도 한다. 다리 밟기는 자신의 나이와 같은 횟수로 왕래하였다. 다리 밟기를 하고 나면 일 년 내내 다리[脚]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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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전동에 있는 사립 남자 중학교. 도덕 정신 함양과 자기 계발에 힘쓰는 지성인, 소질과 적성 계발을 통하여 미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창조인, 강인한 심신과 바른 판단력을 지닌 건강인,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봉사인 육성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계림학원에서 1957년 2월 26일 계림중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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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동문외리(東門外里)의 ‘동(東)’자와 입읍현(立泣峴)의 ‘현(峴)’자를 따서 동현동(東峴洞)이라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읍내면 읍부리가 되었고, 1946년 동문외리·입읍현·백야리(白夜里)를 통합하여 동현동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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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효부. 말질덕(末叱德)은 영조 대에 살았던 사비(私婢)이다. 하루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웃집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가 나타나 시어머니의 한 팔을 물고 놓지 않았다. 이에 말질덕은 시어머니를 살릴 생각으로 자신의 팔을 대신 물게 하곤 시어머니를 업고 집에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제천군지』에는 말질덕이 호랑이를 횃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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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양지에 터를 잡아 밝은 곳이므로 명동이라 하였다. 달리 저자거리, 돌서낭거리, 비석거리라고도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 읍부리 지역으로 1940년 제천읍 소화정(昭和町)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제천읍 명동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명동과 서부동을 통합하여 제천시 명서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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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의림지 안쪽에 있어 못안이라 하였다가 발음이 변하여 모산이 되었다. 안모산과 바깥모산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말 제천군 현좌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북면 신담리(新潭里) 일부를 편입하여 제천군 읍내면 모산리가 되었고, 1940년 제천군 제천읍 모산리가 되었다. 1980년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제천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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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음악에 맞추어 율동적인 동작으로 감정과 의지를 표현하는 예술 분야. 무용(舞踊)은 감정과 음악의 리듬을 몸짓으로 표출하면서 산자와 망자의 매개체로 시공을 초월한 무언의 예술성을 지닌다. 무용은 음악과 문학을 아우른 종합 예술로 전통 민요의 유형에 따라서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로 구분하면서 춤사위도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무용의 시작은 고대 이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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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효자. 문세희(文世熺)[1891~?]는 본관이 남평(南平)으로, 아침저녁의 문안 인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자 밤낮으로 약을 정성껏 마련하여 드렸다.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병세가 좋아지지 않자 제단을 만들고 백 일 동안 기도를 드렸으며, 스물 살 때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9일이나 더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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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활동 또는 그 작품. 문화·예술은 문화와 예술의 합성어이다. 문화(Culture)란 언어·관념·신앙·관습·규범·제도·기술·예술·의례 등의 구성 요소로 광역적이다. 예술(Art)이란 기예(技藝)와 학술을 아우르는 말로 재료·기교·양식 등으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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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교리 청풍호에 잠긴 금병산의 석회암 동굴. 『여지도서(輿地圖書)』·『청풍부읍지(淸風府邑誌)』·『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호서읍지(湖西邑誌)』에 “수혈(水穴)은 병산 아래 있다. 동쪽의 풍혈에서 100여 보 거리에 이어진 절벽 아래 구멍이 있는 곳으로 샘물이 솟아 나오는데, 그 맛은 매우 차다. 혹은 풍혈과 상통한다고 말한다.”라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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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예술. 제천 지역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다양한 미술 관련 유물이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선사 시대 동물 뼈에 선각한 인물상이라든가 삼국 시대의 유물 등 그동안 문화 유적 발굴 조사로 보고된 유물과 문헌 자료를 통하여 시공을 초월하는 다양한 미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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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실(元實). 중종 대의 문신인 민세량(閔世良)의 14세손이다. 민정현(閔鼎顯)은 8세 때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태롭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며 병구완을 하여 사람들이 놀라워하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더욱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와 함께 약물을 드려 결국 회생하게 하였다. 기력을 회복한 아버지가 자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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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교리 청풍호에 잠긴 금병산의 석회암 동굴. 금병산에 위치한 동굴로 밖으로 바람이 불어 나와 ‘바람굴[일명 풍혈(風穴)]’이라고 불렀다. 입구에는 조선 초 학자 정인지(鄭麟趾)가 새긴 것으로 전해지는 ‘풍암(風岩)’ 이라는 글자가 초서체로 각자되어 있어 바람과 관련된 지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바람굴은 청풍강 청초호(靑草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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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격전지. 1216년(고종 3)에 거란 왕자가 대요수국 왕이라 자칭함에 따라 몽고군에게 쫓기게 된 거란대군 10만 명이 내침을 하였다. 1217년(고종 4) 7월 고려군은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휘하에 박달재의 협곡과 고갯마루의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적군을 협공으로 퇴각시켰다. 이후 1258년(고종 45)에 몽고군이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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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제천 지역에 은거한 왕족. 본관은 의흥(義興). 의흥 박씨의 시조로,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 따르면 본성은 왕씨(王氏)였으나 조선 개국 후 화를 피하기 위해 외가의 성을 따라 박씨가 되었다. 가계는 형 박갑규(朴甲規)와 의흥 박씨인 어머니가 파악된다. 박갑규는 고려가 망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박을규(朴乙規)는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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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효부. 본관은 청풍(淸風). 남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의호(朴義浩)이다.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나이 27세에 남편을 여의었다. 팔순 시어머니와 여섯 살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절개를 지키고 효로써 시어머니를 35년간 하루같이 봉양하였다. 또한 집안을 법도 있게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데 의리로 하여 마을 사람들이 청풍 김씨의 지조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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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박필래(朴弼來)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제천시 수산면 금곡(金谷)에서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였다. 부대 내에서 탄환을 제조하는 등 군수 물자 공급을 책임졌다. 원주·충주·삼척·영월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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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순호(順浩), 아호는 동암(東菴). 조선 초기의 문신인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의 후손이다. 박한규(朴漢圭)는 지금의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의 머리에 종기가 났을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치료하였다고 한다. 한겨울에 잉어를 맛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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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출신의 효자. 초명은 반우석(潘瑀錫), 자는 여규(汝圭), 호는 우극(雨屐). 반규석(潘圭錫)은 제천에 살던 한의사로 의술이 뛰어나 편작(扁鵲)이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90세 어머니를 모시면서 항상 음식과 약을 친히 돌보았고, 하룻밤에 대구까지 드나들면서 약을 구하여 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주변에서 약을 묻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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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수산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학원 소속 사찰. 보덕암(寶德庵)의 연원은 신라 시대 왕리조사(王利祖師)가 수행한 보덕굴에서 비롯한다. 왕리조사가 수행한 곳에 1918년 보덕암을 축조하였다고 전하며, 지금의 사찰은 1979년 무허가 사찰이 헐린 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보덕암은 관음도량이며, 왕리조사가 수행하였던 곳에서 연유하였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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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와 팔송리, 명암리, 옥전리, 봉양리에 걸쳐 있는 산. 봉황산이라는 명칭은 산세가 봉황새가 날아가는 비봉형(飛鳳形)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봉양읍이라는 명칭은 봉황산에서 기인하였다. 봉황산이 위치한 제천시 봉양읍 봉양리에 대한 설명으로 『한국지명총람』에 “봉황산의 남쪽이 되므로 봉양리”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천시 봉양읍 봉양리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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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제천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오늘날 제천시 청풍면, 금성면, 한수면, 수산면 등에 해당한다. 고을의 중심 부분은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청풍호에 수몰되었다. ‘사열이’라는 지명은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에서 온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서늘하다’, 또는 ‘차다’는 뜻에서 나온 이두식 표현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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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했던 시대의 제천 지역의 역사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했던 시기부터 고구려 멸망(668년)까지의 시기에 제천 지역은 삼국의 접경지로 남한강을 둘러싼 영토 쟁탈의 중요한 전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남한강 강변에 분포하고 있는 돌무지무덤 등을 통해 볼 때, 삼국 중 제천 지역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백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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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후부터 300년경까지의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고조선 말기에 한강 유역으로부터 남부 일대에 걸쳐 진국(辰國)이라는 하나의 큰 부락연맹체(部落聯盟體)가 형성된다. 그 당시 북쪽에 위치하였던 위만 조선은 우거왕(右渠王) 때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멸망하고 한의 군현이 설치되었고 남쪽 진국은 지리적 환경에 따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삼한으로 나뉘었다.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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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제천 시내 서쪽에 있고 서부시장이 있어 서부동(西部洞)이라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읍내면 읍부리가 되었고, 1940년 제천읍 서정(西町)이 되었다. 1949년 제천읍 서부동이 되었고,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명동과 서부동을 통합하여 행정동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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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출신의 효자. 석두영(石斗永)은 자는 성실(聖實)이며, 도사(都事)를 지냈다. 대대로 청풍에 살았는데, 33세에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30리 밖에 장사를 지내고 매월 초하루마다 성묘하였는데 여러 차례 기이한 행적이 일어났다. 하루는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가운데 성묘를 가려 하였으나 강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자 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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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강제동과 금성면 동막리에 걸쳐 있는 산. 삼국 시대에 축조한 성산성(城山城)이 있어 성산(城山)이라 하였다. 1872년 제작된 고지도에는 고소성(姑蘇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곽이 테뫼식이므로 퇴미산[일명 태미산]이라고도 하고, 호명산에서 이어진 산맥이 성산에 응하여 지맥이 끝나므로 말응달산이라고도 한다. 말응달산은 멍달산을 거쳐 멍달이로 변하였고,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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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손재규(孫在奎)는 원주의 참위(參尉)로 복무하던 중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의 조칙이 내려지자 민긍호(閔肯鎬)와 함께 해산 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진위대 무기고에 있던 무기를 병사들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우리가 만일 원주 읍내에서 교전하면 무고한 백성이 많이 살상되리라”고 하면서 부대를 인솔하여 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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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에 있는 개항기 애국지사의 묘역. 제천시 고암동 산28-9번지, 일명 고래미 장골에 위치한다. 제천 시내에서 영월 방면으로 국도 38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태백선 장락역 건널목이 나오는데, 순국선열 묘역(殉國先烈墓域)은 장락역 건널목을 지나 동쪽으로 800m 거리에 자리한다. 개항기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거의(擧義)한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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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응삼(應三), 호는 학습재(學習齋). 아들로 신재교(辛在敎)가 있다. 신광묵(辛光默)[1872~1949]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고, 1907년(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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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말 또는 신리(新里)라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근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석우리(石隅里)와 동막곡(東幕谷)을 통합하여 신리가 되었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제천시 신동이 되었다. 2003년 7월 7일 행정동인 서부영천동 관할이 되었으며, 2011년 1월 행정동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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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중앙로 2가에 있는 산. 조선 태종 때 제천현 관아가 들어서면서 ‘관아 뒤에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아후봉(衙後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뒤산, 애뒤산, 아사봉이라고도 한다. 달리 북두칠성의 6번째 별 이름을 차용하여 무곡봉(武曲峰)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아후봉이 제천시에 있는 칠성봉(七星峰) 일곱 개 봉우리 중 제6봉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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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내리와 오티리, 덕산면 성암리에 걸쳐 있는 산. 야미산(夜味山)은 본래 백야산(白夜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백야산은 청풍군 남쪽 33리[13.2㎞]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야산은 한밤의 환한 달과 같이 밝은 산의 뜻이다. 백야산은 아미산(娥媚山), 배미산(培美山), 야미산, 배모산(拜母山), 바미산,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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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 야미산에 있는 석회암 동굴. 야미산 정상부에서 북북서쪽 산기슭에 있는 석회암 동굴이다. 이곳에서 만병통치의 효험이 있는 약수가 흘러나온다 하여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야미산 약수굴은 오티리에 있는 청풍나드리 삼거리에 인접하여 있다. 약수의 효험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방문객이 늘어 한때 계곡에 상탕과 하탕을 조성하여 입장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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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양동환(梁東煥)은 본관이 나주(羅州)이며, 을미 의병 당시 이강년(李康秊)과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9년(순종 3)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주 어등산(魚登山)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대파하고 황룡강(黃龍江) 유역에서도 분전하였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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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서 이루어지는 언론 활동 및 출판 활동의 총칭. 언론은 정치·사회·문화·교육 전반에 걸친 정보의 소통 수단으로 말이나 글을 통해 정보 전달과 여론 형성의 역할을 하는 행위를, 출판은 책·잡지·소책자를 인쇄하여 판매·배포하는 일련의 행위나 사업을 각각 통칭한다. 제천 지역에서 발생하는 대소사는 각 언론매체에서 방송, 신문,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하여 음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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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역사와 문화. 전통 시대 제천 지역은 제천과 청풍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렇게 나누어진 지역 사회는 삼국 시대 이래 정치·경제·문화적인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후 1980년 제천시로 통합되면서 지역 사회는 뚜렷한 정체성을 각인시키면서 활동 무대를 점점 확장하고 있다. 제천 지역은 강줄기를 따라 혹은 점말동굴로 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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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본디 모라내[沙川] 옆에 있어서 마을을 모라내, 모랏내 또는 사천리(沙川里)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영정(榮町)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영천이 되었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읍내면 화산리가 되었고, 1940년 제천읍 영정이 되었다. 1949년 제천읍 영천동이 되었고, 1973년 영천1동·영천2동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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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 수도권과 대도시로 집중되고 있는 문화 산업이 지방에서 활성화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천 역시 다른 지방 도시들과 다를 바 없이 영화 제작 관련 사업은 전무한 실정이다. 하지만 제천 지역은 영화 산업에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이는 청풍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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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이자 일본군에 귀순한 인물. 오경묵(吳敬默)은 오정묵(吳正默)이라고 기록된 경우도 많다.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횡성 관아의 수순교 겸 포수계장(首巡校兼砲手契長)이었다. 1907년(순종 1) 여름 원주 진위대가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할 때 20여 명의 포수와 함께 민긍호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민긍호 부대, 정대무 부대 등 여러 의병 부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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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원(子元). 오인용(吳仁庸)은 칠대 독자로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천성이 성실하고 공손하여 어머니 송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는데, 어머니가 중풍으로 병석에 누워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데도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때때로 어머니를 업고서 바깥나들이를 하면서 구경을 시켜 기운을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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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미암(亹巖). 고려 말 문신인 정양(定襄) 오방우(吳邦祐)의 후손이다. 오진호(吳鎭鎬)는 밤중에 침입한 도적이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가로막으면서 흉기를 빼앗다가 손가락 세 개를 잃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술과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공양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을 얻어 여러 해 동안 고통을 겪자 제단을 모으고 백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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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수산리 월악산에 있는 석회암 자연 동굴. 신라 시대 왕리조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 하여 왕리굴(王利窟)이라 불리게 되었다. 후대에 관세음보살의 명호 중 하나인 보덕(寶德)을 딴 보덕굴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현재 왕리굴은 보덕암의 절 구역 안에 있다. 왕리굴의 해발 고도는 428m이며, 좌표는 북위 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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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원덕상(元德常)은 본관이 원주(原州)이며, 지금의 제천시 봉양읍에서 살았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출신의 양반으로 친척인 보산에 살던 의병론자 원도상(元道常)과 왕래하면서 기맥을 통하였다. 의병 활동을 하면서부터 이름을 원건상(原建常)으로 고쳤다고 한다. 1905년(고종 42) 원용팔(元容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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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유금봉(劉今鳳)은 제천시 수산면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제천에서 다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포군으로 참여하였다. 제천시 수산면의 다불리(多佛里), 두무산(杜舞山) 등지에서 단독으로 일본군 수개 중대와 접전할 만큼 용맹무쌍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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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제천 지역에 은거한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의보(義甫), 호는 의두헌(倚斗軒). 문희공(文僖公) 유창(劉敞)의 현손이다. 유안례(劉安禮)[1426~1506]는 1447년(세종 29)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이 되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이 되었고, 1450년(세종 32)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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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효부. 본관은 성주(星州). 남편은 사후에 비서승(秘書丞)으로 추증된 유영종(劉英鍾)이다. 성주 배씨(星州裵氏)는 일찍이 청상과부가 된 뒤 남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가까운 친척이 없어 뒷일을 부탁할 처지가 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예를 다해 남편을 장사 지내고 조상의 제사와 묘소를 받들었는데, 시조부의 묘소 구역에 권세 있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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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남아 있는 선사 시대부터 역사 시대까지의 유적 제천의 문화 유적은 크게 관리 유형에 따라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로 구분되며, 성격에 따라 크게 선사 유적·분묘 유적·관방 유적·교통 유적·불교 유적·유교 유적·천주교/기독교 유적·가마터 유적·고건축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2003년 발간된 제천시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따르면 지정문화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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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민족상잔의 전쟁인 6·25 전쟁에서 제천은 전황에 따라 몇 차례나 공산군과 국군 및 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많은 희생과 갈등을 겪었다. 6·25 전쟁 초기에 강원도와 충청북도 북부 지역 방어는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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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효녀. 윤개(允介)는 천남역에 속하여 있던 여종으로, 유(劉)씨 성을 가졌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생몰년 역시 미상이다. 청풍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다음 날 달려와 보니 이미 염이 끝난 후였다. 하지만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으면서 사지를 주무르니 하룻밤이 지나 깨어나 1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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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효자. 자는 문우(文友), 호는 인재(認齋). 아버지는 윤하박(尹河博)이다. 윤병익(尹炳益)은 윤응선(尹膺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재주와 덕망을 고루 갖추어 칭찬이 높았다. 특히 행동이 돈독하고 효와 우애가 깊어 제천 유림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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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군서(君瑞), 호는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1854~1924]은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1889년(고종 26)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주역』를 공부하던 40세에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를 만났다. 윤응선은 본래 양평 출신인데, 병인양요 이후 조부를 따라 청풍 장선으로 이주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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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목소리나 악기를 소재로 박자·선율 등을 일정한 법칙과 형식으로 종합하여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시간 예술. 제천시는 과거 사군(四郡)이라 일컬어지던 청풍과 제천이 포함된 지역으로,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예술적 감성이 담긴 작품을 남겼다. 음악도 마찬가지여서 신라 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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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의림지(義林池)에서 따 왔으며 전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이름이다. 개항기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읍내면 읍부리(邑部里)가 되었고, 1940년 제천읍 대화정(大和町)이 되었다. 1946년 의림동(義林洞)으로 개칭하였고,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제천시 의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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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효자. 이광우(李光雨)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병을 얻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지금의 제천시 덕산면 와룡소에 있는 대학자 윤응선(尹膺善)의 집까지 달려가서 약을 구해다가 병을 낫게 하여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열일곱 살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너무 애통해 하여 몇 차례나 기절한 나머지 남의 등에 업혀서 간신히 장례를 치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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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우문(于文)·명오(明五), 호는 광암(廣菴)·광거재(廣居齋). 이규현(李奎顯)[1874~1951]은 단양 품달마을에 살았다.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숙부이면서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인 이필희(李弼熙)에게 배웠고, 후에 장담에 출입하면서 유중교와 유인석(柳麟錫)에게도 배웠다.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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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군에서 일어난 을미의병 이소응의진 및 개항기 제천 호좌의진에서 활동했던 의병. 이면수(李勉洙)[1833-1898]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의(義)를 중하게 여겨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을미의병의 주역이었던 습재 이소응 장군의 종조부(從祖父)로서 1896년 1월경 강원 춘천군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통문을 돌려 독려하고 이소응 의진에서 군사장으로 활동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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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현(景賢). 이범규(李範圭)[1874~?]는 민영기가 설립한 중교의숙(中橋義塾)에서 영어·일어 등을 공부하였다. 29세 때에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 내부주사가 되었다. 덕수궁 의효전(懿孝殿) 사승(祀丞)을 역임하던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자 이를 반대하는 동우회를 조직하여 군중집회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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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사빈(士彬). 경창군(慶昌君)의 5세손이다. 이우(李堣)는 한겨울에 병든 아버지가 싱싱한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구할 수 없어 하늘에 호소하면서 얼음을 뚫은 끝에 물고기 두 마리가 뛰어 올라와 공양할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가 꿩고기를 찾자 눈 덮인 산에 올라 애를 태우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내려앉아 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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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오(明五), 호는 백농(白農). 이진하(李晋夏)는 단양에 살던 선비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은 친일 군수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을 공략하는 한편, 주변의 여러 고을을 해방구로 확보하였다. 이때 호좌의진 대장 유인석(柳麟錫)은 장악하고 있던 고을마다 수성장을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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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여러 사회 간접 자본을 확충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천 지역에서는 항일적인 색깔이 분명한 이범우(李範雨) 등이 주도한 3·1 운동, 제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 투쟁, 김학간·김정호 등이 주도한 제천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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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충청북도 제천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통합을 공고히 하고 지방 세력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명나라 진출을 명분으로 내세워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을 감행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부산포 침입으로 개시된 임진왜란은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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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예전 마을에 창락사(昌樂寺)가 있어 창락이라 하였다가 장락(長樂)으로 바뀌었다. 달리 정거룬·정거여·정거랭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 제천군 현좌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토구지리(土九之里)를 통합하여 제천군 읍내면 장락리가 되었고, 1940년 제천군 제천읍 장락리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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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효부이자 열녀. 원주 이씨는 장우정(張宇井)의 아내로, 시어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밤낮으로 기도하여 낫게 하였다. 1730년(영조 6)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임신 중이라 따라 죽지 못하였는데, 아이가 유산되자 탄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1773년(영조 13)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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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李翰)을 시조로 하고 이숙(李俶)과 이정희(李廷熙)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세거 성씨.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시대의 사공(司功) 이한으로, 전주 이씨 족보인 『선원선계(璿源先系)』에 따르면 전주의 토착 세력으로 명문 태생이었다고 한다. 22세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전주 이씨는 왕성이 되었다. 전주 이씨는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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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지역의 열녀. 본관은 상산(商山). 남편은 정수영(鄭壽永)이다.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28세 때 남편이 집을 나가 10년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재가하라고 권하였으나 거절하고 어린 자식을 데리고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갔다. 10여 년 만에 돌아온 남편이 하루 뒤 다시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는데,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곧장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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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덕(仲德·重德), 호는 소송(小松). 정술원(鄭述源)[1860~1931]은 많은 의병론자를 배출한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출신으로,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활동할 때 대장 종사로 활약하였다. 1905년(고종 42) 초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일진회를 제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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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효자. 정영선(鄭嶸善)은 본관이 초계(草溪)이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옷 띠를 풀지 않고 밤낮으로 곁을 지키면서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여막에서 생활하면서 조석으로 예를 다하였다. 정영선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고종으로부터 감찰의 관직과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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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조선 중기의 명신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정운몽(鄭雲夢)은 부모의 뜻을 어긴 일이 없었으며, 부모의 회혼례를 정성껏 차려 칭송이 높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고 드렸다. 아버지가 별세한 뒤에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겨울이면 먼저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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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경존(景存). 정익(鄭瀷)[1860~1904]은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자 문중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의진에 참여하여 대장 종사로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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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열녀. 본관은 정선(旌善). 남편은 정진선(鄭進善)이다. 정선 전씨(旌善全氏)는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요절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뒤를 따랐다. 1891년(고종 28) 정려를 받았으며,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정려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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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대재(大哉). 정해창(鄭海昌)[1885~1909]은 제천 서면(西面)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한 후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50여 명을 이끌고 동참하였다. 이후 이강년의 참모관과 좌군장, 이세영(李世榮) 진영에서 중군으로 활동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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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편찬된 충청북도 제천군의 향토지. 조선 후기에 각 지역에서 간행된 읍지 가운데 일제 강점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 제국 시기의 필사본 지리지이다. 통감부 체신관서의 양면 괘지에 필사한 것으로 어떤 군은 해서체로 잘 정리된 부분도 있으나, 어떤 군은 행초 서체로 필사한 곳도 있어 전체적으로 체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내용에 있어서도 불충분한 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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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제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충청북도 제천군의 연혁·산천·고적·인물 등을 기록한 향토지. 『제천군지』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각종 지리지를 근간으로 하여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변화된 제천군의 역사와 일반 현황을 수록한 자료이다. 특히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옛 제천현과 청풍현 지역이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되고, 중앙선과 충북선 철도의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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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서화첩은 1802~1803년 청풍 부사 안숙(安叔)이 청풍, 제천 등 4군의 명승을 유람하면서 읊은 시문과 화가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1761~1815]이 그린 그림으로 구성된 서화첩이다. 표제에서 거론된 ‘사군(四郡)’이란 충청북도 내 청풍·제천·단양·영춘을 가리키며, ‘강산(江山)’이란 제천 지역 안에 흩어져 있는 명승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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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제천시 중앙에 있는 중심가이므로 붙인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두무곡(杜珷谷)[일명 두무실]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동문밖[東門外]·동문거리라 하였다. 1940년 제천면이 제천읍으로 승격함과 더불어 본정일정목(本町一丁目)이 되었고, 1946년 제천읍 중앙로 1가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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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제천시 중앙에 있는 중심가이므로 붙인 이름이다. 예전에는 아뒤[衙後], 어물전 골목, 황애젓 골목으로 불렸다. 1940년 제천면이 제천읍으로 승격됨과 아울러 본정이정목(本町二丁目)이 되었고, 1946년 제천읍 중앙로 2가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제천시 중앙동이 되었고,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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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같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 집성촌은 성(姓)과 본(本)이 같은 부계의 혈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이를 동족 부락, 동족 마을, 동족 촌락, 동성 마을, 집성 마을 등이라고도 한다. 같은 핏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은 삼국 시대에서 조선 초기에도 있었을 것이나 동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마을 운영을 위한 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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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강(平康). 조선 중기의 문신인 죽촌(竹村) 채경선(蔡慶先)의 12세손이다. 채도영(蔡道榮)은 지금의 제천시 수산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50세에 홀아비가 된 후 여러 차례 장가를 갔으나 아버지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하면 즉시 내보냈다. 아버지가 90세에 이르러 중병이 들었을 때 붕어를 먹고 싶다고 하여 안타까워하자 독수리가 큰 붕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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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의천(義泉), 곧 의림지의 남쪽이 되므로 천남(泉南)이라 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저남 또는 즈남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 천남역이 있었으므로 역촌 또는 역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말 제천군 근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고지동(古智洞)·사리동리(沙里洞里)[사리골리]와 현우면 하소리(下所里) 일부를 통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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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편찬된 충청북도 청풍군[지금의 제천시]의 향토지. 1914년에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제천군에 편입된 옛 청풍군의 읍지이다. 조선 후기에 각 지역에서 간행된 읍지 가운데 일제 강점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 제국 시기의 필사본 지리지이다. 통감부 체신관서의 양면 괘지에 필사한 것으로 어떤 군은 해서체로 잘 정리된 부분도 있으나, 어떤 군은 행초 서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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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최두익(崔斗翼)은 자는 성우(聖禹)이며, 지금의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진에 투신하였다. 단양의 황정(黃庭)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청주 감옥에서 복역 8년 만에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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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효자. 최일경(崔一京)은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 구경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업고 다니기를 몇 년 동안이나 하였고,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두말 않고 사 드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별세하자 정성껏 장사 지내고 제사를 올려 모두가 감탄하였다. 제천 유림에서 효행비를 세워 길을 오가는 사람마다 최 효자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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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최중봉(崔中奉)은 호는 중봉(重峰)이며, 을미 의병 기간에 민용호를 중심으로 한 강릉 의병진에서 중군으로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이 남산 전투에서 패하고 서북행을 단행할 때 참여하였다가, 철원에서 적에게 체포된 뒤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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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에 있는 제천시 관할 교육 행정 기관. 충청북도 제천교육지원청은 제천 지역의 학교 교육과 평생 교육에 관한 사무와 지원을 위해 설립되었다. 1949년 12월에 교육법이 제정·공포되고 이에 따라 1952년 시·군 교육 자치제 시행되면서 제천교육구가 발족되었다. 1961년에는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하여 그 기능이 일시 중단되었으나,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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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청풍 지역의 취봉치(鷲峰峙)에서 벌어졌던 전투. 1592년 4월에 왜군이 수만의 병력으로 침공해 오자 오랜 승평(昇平) 세월에 잠겨 있던 조선의 관군이 무너져 버렸다. 이에 향촌 사회에서 성장해 온 재지 사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섰다. 의병들은 보잘 것 없는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도 지리에 밝고 향토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하여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에 큰 변수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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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분포되어 북두칠성 형상을 하고 있는 일곱 개의 봉우리. 『제천군지』에 의하면 “독송봉(獨松峯), 연소봉(燕召峯), 성봉(星峯), 요미봉(要美峯), 자미봉(紫美峯), 아후봉(衙後峯), 정봉산(丁峯山) 일곱 봉우리가 북두칠성(北頭七星) 모양을 이루고 있어 칠성봉이라고 한다. 일곱 개 독봉이 북두칠성 모양을 이룬 곳은 전국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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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산수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집터인 양택(陽宅)과 묘지인 음택(陰宅)으로 사용하는 데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이론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최적의 조건으로 삼는다. 즉 흘러가는 물줄기에 넓은 들판과 산세의 지맥이 끊어지지 않고 모래흙에 찬샘이 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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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고른이의 아래가 되므로 붙인 이름이다. ‘이’란 행정 집행을 위한 소(所)가 있던 곳을 지칭하는 말로, 고른이는 골의 일을 보는 이란 뜻이다. 오늘날로 이르면 출장소 또는 파견 관원이 일을 하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하소동은 출장소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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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하수경(河秀京)은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진에 투신하였다. 우선봉으로 활약하다가 충주 금가 전투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9년 만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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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학현리와 수산면 능강리에 걸쳐 있는 산. 학봉(鶴峰)은 봉우리의 형상이 학이 앉은 형상을 띠기 때문에 명명되었다. 학현리 ‘마을 자랑비’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아가던 학이 잠시 쉬어가려고 동남쪽 금수봉에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바위로 변하였다 하여 지금도 그 바위를 학바위라고 칭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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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태백선·충북선이 만나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조차장이 위치한 제천시는 철도 교통의 요지로서 철도에 의해 도시가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근년에 자동차 도로가 정비됨에 따라 철도 교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근대 이전의 제천은 산으로 둘러싸여 육로 통행이 용이하지 않은 고을이었다. 그러나 대신 남한강 물길이 지역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교통의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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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금수산한양지에 있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구멍. 한양지(寒陽地)는 여름에도 얼음이 얼 정도로 추워 찰 한(寒)자가 붙은 것으로 여겨진다. 일명 ‘얼음골’로 불린다. 한양지는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형도에 처음으로 ‘한양지(漢陽地)’로 기록된 이후 『제천군지』, 『한국지명총람』에 계속해서 언급되었다. 본래는 ‘한양지(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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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지리, 풍속, 산업 따위를 조사 연구하여 기록한 책. 향토지의 일반적 개념은 해당 지역의 역사와 지리 등 모든 현황 자료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책을 말한다. 편집자에 따라 내용의 초점이 다를 수는 있으나 대개는 편찬 당시의 모든 지역 사정을 망라하고 이를 정리하여 출판하게 되는데,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이 아무래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 유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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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열녀. 본관은 한양(漢陽). 남편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뒤 순국한 홍원(洪遠)이다. 아들로 홍여수(洪汝守)가 있다.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남편이 아들 홍여수와 함께 청풍의 수리봉재[鷲峰峙]에서 전사하자 며느리 전의 이씨(全義李氏)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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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와 화당리를 연결하는 다리.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의 지명을 따서 화당교라 이름 붙였다. 왕복 2차선 교량으로 총연장은 56m, 총 폭은 10m, 유효 폭은 8m이다. 높이는 3.4m, 경간 수는 4개, 최대 지간장은 14m이며, 설계 하중은 DB-24톤, 통과 하중은 43.2톤이다. 상부 구조는 RC슬라브교이며, 하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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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본관은 진주(晉州). 시아버지는 강성학(姜聲鶴)이고, 남편은 강상구(姜商求)이다. 황광자(黃光子)는 17세에 결혼하였다. 20세 때 남편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늙은 시부모와 어린아이 때문에 따라 죽지 못하였다. 남편을 장사 지내고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참배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무덤을 보살피는 등 정성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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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천 지역의 열녀. 본관은 진주(晉州). 남편은 황세택(黃世澤)이다. 강씨(姜氏)는 남편이 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자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앓겠다며 밤낮으로 기도하여 13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다. 얼마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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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철수(黃哲秀)는 본관이 창원(昌原)이며,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919년 제천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제천 수비대에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였다. 이때 7일간 단식으로 저항하여 제천 수비대에서 의사(義士)라고 일컬으면서 석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