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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성숙(聲叔), 호는 청해(靑海). 강난수(姜蘭秀)는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대장 유인석(柳麟錫)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재정을 담당하였다. 1896년(고종 33) 3월 박종문과 함께 단양에 있는 역토(驛土)에서 도조를 거두는 일을 하였고, 청풍의 오산(伍山) 쪽에 주둔하던 이강년(李康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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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서상렬의 문집. 서상렬(徐相烈)[1854~1896]은 충청북도 제천의 을미의병 기병 시 군사로 추대되어 장회 전투를 지휘했고,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서는 영남소토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장담의 강학을 이끌던 인물로 유학 및 선비의 실천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서상렬은 의병 부대를 이끌고 간도를 향하여 북진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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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구철조(具哲祖)는 본관이 능성(綾城)이며, 오위사과(五衛司果)를 지낸 관료 출신이다.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제천의 호좌의진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원주 수성장으로 임명되어 도망간 원주군수를 대신하여 향리 조직을 통제하고 원주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면서 의병 모집과 군수 물자의 공급을 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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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권기수(權夔洙)[?~1896]는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교관(敎官) 출신이다. 호좌의진이 1896년(고종 33) 5월 제천의 남산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한 후, 유인석(柳麟錫)을 따라 서북 지방으로 이동하는 서행(西行)에 참여하였다. 이때 서행하려던 의병 측은 화서학파의 중요한 근거지인 서북 지역에 미리 유치경(兪致敬)과 이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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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권도연(權道淵)[1886~1910]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1908년(순종 2) 여름 이강년(李康秊)이 체포된 이후, 이강년의 뒤를 이어 호좌의진을 이끈 김상태(金尙台)의 휘하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주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접경지대인 소백산 일대에서 전개된 일본군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3월 초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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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명상(權命相)[1883~1951]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많은 운동가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거둘 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활동하였다.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내의 역량을 동원하여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던 시기이었다. 1919년 가을 정인옥(鄭寅玉)에게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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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권순명(權順明)[1876~?]은 제천의 장담에 살던 농민으로, 1908년(순종 2) 여름 김춘쇠(金春釗)의 부하로 가담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600여 명의 동료와 함께 경기도 양주군·가평군,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군자 금품을 거두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특히 1908년 9월 30일 강원도 홍천군 남천리(南川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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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권영선(權永先)[?~1908]은 1908년(순종 2) 1월 초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에 거주하던 중 김윤학(金潤學), 이근백(李根伯), 이동인 등과 의병 장비를 감추고 있다가 영천 수비대에게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운학동[현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제천에서 활동하던 의병 주력 부대는 1907년(순종 1) 말 북상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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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활동한 아동 문학가. 권오순(權五順)[1919~1995]은 황해도 해주에서 교육 사업을 하던 권영붕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후 일본식 학교 교육을 받는 대신 집에서 어린이 잡지를 읽으면서 독학하였다. 1933년 『어린이』 5월호에 동시 「하늘과 바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 『아동문예』에 여러 편의 동시를 투고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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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로(敬魯), 호는 청은(淸隱). 권용일(權用佾)[1884~1971]은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 딱밭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장으로 일하던 18세 때 청풍의 일본군 헌병 주재소에서 할당하는 마초(馬草)의 감면을 요구하다가 질책을 받자 헌병들을 구타하고 주재소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 이후 행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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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사회 운동가이자 소설가. 권운상(權雲相)[1955~1996]은 제천시 금성면 동막리에서 권수(權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중경고등학교를 다니던 1973년 유신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국민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면서 유신 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 시위를 주동하였다가 1976년 제적되었다. 이후 광부·재단사·조선소 도장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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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권재중(權在重)[1853~1919]은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이 영남 지역의 의병을 규합하기 위하여 서상렬(徐相烈)을 소모사[소토사]로 파견하였을 때 인연을 맺은 후 줄곧 그의 종사관으로서 종군하였다. 호좌의진이 영남 일곱 고을의 의병을 예천에서 규합하여 태봉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할 때 참여하였으며, 조령의 일본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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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종필(權鍾弼)[1885~1965]은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에 살았다.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서울의 만세 운동에 뒤이어 제천에서도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이범우의 주도로 4월 17일 제천 장날에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이기하·전필현 등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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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권진(權璡)[?~1896]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보수적인 성향의 선비로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정운경(鄭雲慶) 등과 함께 단양 영춘 현곡리의 동학 지도자들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진 후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자 정운경과 함께 참여하였고, 호좌의진에서 영남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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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권호선(權灝善)[?~1897]은 청풍에 살던 선비이다. 호좌의진이 중부 권역의 20개 고을을 관장하던 충주부를 공략할 때 활약하였다. 당시 호좌의진의 주력 부대는 박달재를 경유하여 공격하였는데, 권호선은 신지수(辛芝秀)·조달승(曺達承) 등과 함께 별동 부대를 거느리고 청풍 쪽을 돌아서 충주성을 공략하였다. 충주를 빼앗기고 제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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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권상하(權尙夏)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도상(權道相)이다. 공화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어 전개된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나라 안팎에서 여러 개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울에서는 3·1 운동의 감동 속에서 한성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권희목(權熙穆)[1891~1930]은 이규갑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인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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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해방에 이르기까지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전형적인 산간 고을이었던 제천은 근대를 거치면서 항일 의병의 본산이 되어 탄압을 받았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저항 운동을 경험하였다. 경제면에서는 밭곡식을 주로 재배하였는데 점차 담배 재배 등 수익성 작물의 재배 비중이 높아졌다. 또한 철도·도로 등 산업 기반 시설의 확충이 이루어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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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과 이범윤 의진의 의병. 김교헌(金敎憲)[?~1908]은 단양군 영춘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한 관료이었으며, 1895년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전군장인 정운경(鄭雲慶)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다가, 후에는 제천 의병을 치러 오는 관군이 출동하였을 때 원주 신림 쪽을 방어하는 파수장으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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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김규철(金奎喆)[1881~1929]은 궁내부 주사(主事)를 역임한 관료이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청풍 지역에서 조동교(趙東敎)·신기영(申基永)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명상(李明相) 부대의 중군장을 맡은 적도 있다. 주로 단양과 금수산(錦繡山)을 근거지로 제천·청풍·단양·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이강년(李康秊)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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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김규환(金奎桓)은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를 넘기면서 탄환이 고갈되고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강화되면서 의병이 점차 수세에 몰렸는데, 1908년(순종 2) 여름 이강년이 청풍의 작성 전투에서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고 의병 진영이 흩어지자, 이강년과 함께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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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활동한 화가. 김례호(金禮鎬)[1926~1971]는 평양 출신으로 사업을 하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학 경력은 확실하지 않으나 해방 전부터 이중섭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일찍부터 동료들로부터 ‘한국의 고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개성 있고 역량 있는 작가로 평가되었다. 해방 후 평양미술연구소와 평양미술학교에서 활동하다가, 1949년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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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백선(金伯善)[1873~1896]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맹영재가 조직한 포수 부대에 참여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고 절충장군의 첩지까지 받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지자 지평군수 맹영재에게 의병을 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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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명화(明火). 김병명(金秉明)[?~1896]은 제천시 금성면 동막리에서 살았다. 단발령 이후에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이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하였을 때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공략하고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군 주둔 지역을 공격하였는데, 특히 충주의 가흥에 자리 잡은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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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사두(金思斗)[1865~1896]는 원주의 안창마을에 세거하던 연안 김씨(延安金氏) 출신으로 사종(四從)간인 김사정(金思鼎)과 함께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 문중을 대표하여 참가하였다. 초기에 의진을 이끈 이춘영(李春永)의 처가 집안이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호좌의진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던 중군장 안승우(安承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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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매(公梅), 호는 벽하(碧河). 원주 안창마을에 세거하던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자손이다. 김사정(金思鼎)[1869~1942]은 진사를 지냈으며, 1895년 단발령 이후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伯善) 등이 안창에서 의병에 가담하였을 때 사위인 이춘영을 매개로 하여 문중 대표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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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삼척(三陟). 본명은 김상호(金尙鎬), 자는 경륙(景六), 호는 백우(白愚). 아버지는 김병규(金丙奎)이다. 김상태(金尙台)[1862~1911]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한 후 영월의 옥동으로 이주하였다. 단발령 이후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고, 호좌의진이 북상한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좇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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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봉용(金鳳容), 자는 주서(周瑞), 호는 청은(淸隱). 문간공(文簡公) 김세필(金世弼)의 12세손이며, 아버지는 김수명(金秀命)이다. 김상한(金商翰)[1848~1917]은 이기문(李基文)에게 배웠다. 어린 시절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유생 시절에 정국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3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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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의 의병. 김선이(金仙伊)[1880~?]는 순흥군 봉양마을에 살던 1907년(순종 1),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말미암아 의병이 일어나자 참여하였다. 순국한 이강년(李康秊)의 뒤를 이어 의병 활동을 전개한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의 휘하에 투신하였다. 1909년(순종 3) 이래 봉화·영천·영월 등 소백산맥을 낀 접경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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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충주성과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군 주둔 지역을 공격하였다. 특히 충주의 가흥에 자리 잡은 일본군 기지는 남한강 물길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내륙으로 통하는 소금 등의 공급을 방해하였다. 이에 가흥의 일본군 기지를 제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가흥 공격 작전이 수행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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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수돌(金水乭)[?~1896]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의 지도하에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포군으로 활동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와 방어전에 치중하고 있을 때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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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수동(金壽童)[1885~1910]은 단양의 영춘면 동대리 수발마을에 살았으며, 군대 해산 이후 의병 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순종 1) 9월 이강년(李康秊) 부하로 의병 활동을 시작하여 그해 말까지 문경·단양·영춘·영월 등의 군내에서 양식과 짚신 등 군수 물자를 징발하는 일을 하였다. 갈평·영월·장현(獐峴)·영춘 지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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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언형(金彦型)[1892~?]은 1920년 7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김덕선, 정호척, 김재현, 주효점, 지달하 등과 함께 대한독립신민단을 조직하였다. 본부는 노령에 두었으며 북간도 연길현 옹성패자명월구에 참모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신민단은 이민족 지배 반대, 국내외 자본주의 및 군국주의 타파, 계급 제도 타파, 빈곤 해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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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용이(金用伊)[?~1896]는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포수로 종군하였다. 의진의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과 함께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나섰다가 청풍의 서창(西倉)에서 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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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용준(金龍俊)은 경기도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출신의 의병으로 포군으로 활약하였다. 단발령 이후 이춘영(李春永), 김백선(金伯善) 등이 지평의 포군을 기반으로 의병을 처음 일으켰을 때 참가하였다. 나중에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활동하였다.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가흥, 수안보 등을 공략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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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김우경(金祐京)은 본관이 청풍(淸風)으로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서 살았다. 군대 해산 후 1907년(순종 1)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종군하여 금수산·청풍·단양 전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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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운선(金雲仙)은 원주에서 평민으로 태어났으며, 포군으로 활동한 듯하다.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가담하여 우선봉으로 활약하였다. 나중에 원주에 들어가서 참위(參尉) 손재규(孫在奎)의 부하로 있다가 1907년(순종 1) 여름 군대 해산이 있은 후 손재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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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인이자 관료. 김유택(金裕澤)[1911~1975]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경성고등상업학교, 일본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에 입사하여 해주 지점 지배인을 역임하였고, 해방 후 조선은행 이사로 취임하였다. 1950년 이후 한국은행 총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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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군대 해산 후에 제천에서 활동하던 의병의 주력 부대가 1907년(순종 1) 말 북상하고, 이후 일본군 수비대와 맞서는 의병 활동이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될 무렵 일본군은 의병들의 ‘귀순’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한편, 의병 및 의병 협조자들에게 강력한 탄압을 가하였다. 김윤학(金潤學)[?~1908]은 1908년(순종 2) 1월 초 제천시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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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의 대제중학교를 설립한 교육가. 김익로(金翼魯)[1917~1993]는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강원도 진부에서 오대물산을 창업하여 목재소, 정미소, 운수 업체 등을 경영하여 성공하였다. 오대산 일대의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평생 동안 66.16㎢에 1,200만 그루의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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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시(聖時). 김인구(金仁求)[1860~1933]는 단양의 향산리에서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였다. 단양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전투 이후에 충주 방면으로 퇴각하던 본진으로 돌아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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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재관(金在觀)[?~1896]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포수로 종군하였다. 의진의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에 호응하여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나섰다가 청풍의 서창(西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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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정치인. 김종무(金鍾茂)[1908~1987]는 본관이 김해(金海)이며, 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1937년경 송학면장을 역임하였다. 노의중과 함께 제천주조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천부읍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회 쪽에서 반탁 운동에 참여하였고 군청 내무과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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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김준석(金俊石)은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군인 출신인 박여성(朴汝成)이 제천의 청풍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합류하였다. 주로 금수산과 단양 하일(夏日)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싸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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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진목(金鎭睦)[1899~?]은 제천 남천 출신으로 주로 미주에서 활동하였다. 3·1 운동 때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반 학생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대한문까지 행진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석방된 후 일본어 서적을 모두 불태우고 졸업반인데도 총독부 관립 학교라 하여 나가지 않았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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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김차명(金次明)[1875~?]은 강릉시 월면 해전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변학기(邊鶴基) 부대의 좌익장으로 경상북도 북부에서 강원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후에 변학기가 이강년(李康秊)과 합치자 이강년 의진의 선봉이 되었으며, 흔히 ‘박선봉’으로 불렸다.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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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김창로(金昌魯)는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투신하여 종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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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철상(金喆相)[1878~1966]은 본관이 영양(英陽)으로, 경상북도 용궁 사람이다. 1895년(고종 32) 말 단발령이 내리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병 운동에 가담하였다. 마고성(麻姑城) 전투 이후 의진이 힘을 떨치지 못하게 되자 제천으로 옮겨 호좌의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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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김춘삼(金春三)[1879~1945]은 청풍의 사창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7월 봉기한 조동규(趙東奎) 부대에 참여하여 전령(傳令)의 책임을 맡았다. 15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충주·제천·청풍·원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청풍 읍내를 포위 공격하여 주재소에 불을 지르는 등 항전을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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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해풍(海豊).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 김태원(金泰元)[1863~1932]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출사하여 별군직과 선전관청 선전관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있은 직후 김하락·구연영·조성학·신용희 등과 함께 이천에서 봉기할 때 선봉장을 맡았다. 백현(魄峴)·이현(梨峴) 등지에서 접전하여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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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삼궁(三弓), 호는 시백(時伯). 형으로 김현갑(金顯甲)과 김현장이 있다. 김현세(金顯世)[1886~1950]는 강원도 정선 출신이다. 포수 생활을 하던 형 김현갑이 이강년(李康秊)의 중군장인 김상태(金尙台) 의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가자 이를 구해 내고, 둘째 형 김현장이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자 대신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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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일(仲一), 호는 복암(復菴). 김화식(金華植)[1866~?]은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유중교(柳重敎)와 유인석(柳麟錫)에게 학문을 배웠다. 유인석이 주도하는 호좌의진이 일어날 때는 고향인 보령에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수백 리 길을 달려와 의진에 합류하였다. 단발령 이후에 장담의 선비들이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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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남산에 있는 개항기 때 의병과 관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곳. 제천 남산은 제천 의병의 항일 정신이 깃든 격전지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 의병은 유인석(柳麟錫)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1896년(고종 33) 2월 17일에 충주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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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상언(南相彦)은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7일 제천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을 경찰이 감당하지 못하자 수비대까지 출동하여 진압했다. 이때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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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홍(聖洪). 남필원(南泌元)[1856~?]은 강원도 영월군 출신으로 제천 장담에서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이다. 단발령 이후에 호좌의진의 영남 소토장 서상렬(徐相烈) 휘하의 소모중군을 맡아 영남 지역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그 후 영월군 상동면장을 역임하다가 1905년 원용팔(元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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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활동한 사업가이자 정당인. 노의중(盧義重)[1909~1980?]은 청주 출신으로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실업계에 투신하였다. 충북피복공업조합연합회 이사장직을 4년간 역임하였고, 의림양조주식회사 및 중앙곡자회사 사장을 하면서 실업가로서 활동하는 한편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6·25 전쟁 후 자유당 제천군당 위원장을 4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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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 김해일의 문집. 김해일(金海一)[1640~1691]의 본관은 예안이며, 자는 종백(宗伯), 호는 단곡(檀谷)이다. 아버지는 김단(金鍴)이며, 아들은 학고(鶴皐) 김이만(金履萬)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1680년 겨울부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제천의 경치에 매료되어 10여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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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에 있는 철도 수화물 처리와 관련된 건물. 일제 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경영이라는 목적 하에 주요 자원을 가져가기 위해 철도 건설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서 건설한 중앙선은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경기도 등 동부 지역 일대의 지하자원 수탈과 만주~일본을 잇는 교통선을 개발하기 위해 1936년 착공하였다. 1941년 9월 1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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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거나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구한말 항일 의병의 본거지였던 제천 지역은 다양한 형태의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국권 회복의 날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국권 상실 직후에는 의병론자들이 개화론자들과 연대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눌려 복벽(復辟)운동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후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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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제천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토호 세력의 횡포에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봉기가 이어졌는데, 제천 지역의 경우 청풍에서의 농민 항쟁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 농민들의 불만을 결집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세력인 동학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 제천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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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만초(萬初)[?~1907]는 성을 알 수 없다. 겸동(傔童)이라고 부른 점으로 보아 이강년(李康秊) 의진 중군장 김상태(金尙台) 집안의 하인으로, 의진에서 심부름을 하던 소년으로 짐작된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봉기한 이강년 의진은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의 의병과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의병 부대는 1907년(순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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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 학생들이 단행한 동맹 휴학. 1926년 순종(純宗)의 인산(因山)을 앞두고 제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두 차례에 걸쳐 맹휴 투쟁을 일으켰다. 1차 맹휴는 일부 부적절한 교사들에 대한 배척이 표면적인 이유였고, 2차 맹휴는 순종 황제에 대한 일본인 교장의 불경한 언동과, 제반 학사에 대한 교장의 고압적이고 비교육적인 처사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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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봉래(鳳來), 호는 우초(愚樵). 민순호(閔舜鎬)[1880~1965]는 경상북도 문경군 출신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있은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이강년(李康秊)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민순호는 전 재산을 기울여 군자금을 마련하며 의병을 규합하였다. 문경에서 패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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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교육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연약(淵若), 호는 퇴금(退琴). 민영복(閔泳復)[1859~1939]은 1885년(고종 22)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였고, 내직으로 비서승, 외직으로 무주·금산·장성 등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에 가당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1909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에 흥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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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민영팔(閔泳八)[1870~?]은 단양 현곡리에서 살았으며, 을미의병 당시 의병을 일으켜 제천·청풍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적과 싸우다가 1896년(고종 33) 11월 홍주에서 잡혀 진도로 유배되었다. 1907년(순종 1)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였고, 정미 의병 때 단양에서 이명상(李明相)과 함께 포군을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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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전개되었거나 제천 지역 출신자가 전개한 민족 해방 운동.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제천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민족 운동들이 일어났다. 비타협적 무장 투쟁 노선의 원류가 된 의병을 비롯하여 3·1 운동이 일어났으며 학생 운동, 청년 운동 등의 사회 운동과 교육 운동도 일어났다. 3·1 운동은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던 이범우(李範雨)가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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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박갑주(朴甲胄)는 강원도 원주에서 살았다. 1907년(순종 1) 이강년(李康秊)이 제천 지역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휘하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의진의 별초(別抄)로 활약하였다. 싸리재·죽령 전투 등에서 맹활약하였으며, 복상골 패전 이후 의진이 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영월 전동(錢洞)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후 부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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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한학자이자 순국 열사.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아버지는 박기숙(朴紀淑)이다. 박세화(朴世和)[1834~1910]는 함경도 고원에서 태어나, 일찍이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어 23세 때 영흥에서 강학하던 홍직필의 제자인 이사현(李思峴)에게 나아가 10년간 학업을 익혔다. 40대 이후에는 안변, 평강, 회양, 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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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에 제천의 의병 활동과 3·1 운동을 지원한 인물. 박수창(朴守昌)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에 살던 선비로, 재력이 넉넉하여 박 부자라고 불렸다. 1905년(고종 42) 여름 을미 의병 당시, 호좌의진의 맹장이던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을 다시 일으킬 때 장소와 나귀 및 총기 등 군수 물자를 지원하고, 의병을 일으키려는 포군 최병덕과 정재식을 호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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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충주(忠州). 이명은 박성렬(朴成烈). 박여성(朴汝成)[1860~1908]은 1907년(순종 1) 평양 진위대가 해산된 후 청풍으로 내려와 조동교(趙東敎)·황대성(黃大成)·방필성(方必成)·박덕준(朴德峻)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뒤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8월 15일 제천에서 스에야스(末安)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약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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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박원용(朴元用)[?~1896]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포수로서 종군하였다. 의진의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과 함께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나섰다가 청풍의 서창(西倉)에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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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관여(觀汝), 호는 회당(悔堂)·학림(鶴林). 박정수(朴貞洙)[1859~1917]는 유중교(柳重敎),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난 화서학파의 선비이다. 영월의 주천면 금마리, 단양의 석교, 제천의 청풍 등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장담의 선비들이 모여 처신 방법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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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박필래(朴弼來)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제천시 수산면 금곡(金谷)에서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였다. 부대 내에서 탄환을 제조하는 등 군수 물자 공급을 책임졌다. 원주·충주·삼척·영월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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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방필성(方必成)은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청풍에서 박여성(朴汝成)이 일으킨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8월 15일에는 스에야스(末安)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1개 소대를 제천의 천남에서 맞아 여러 의진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여 4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크게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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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남수(南壽), 호는 운암(雲庵). 백남규(白南奎)[1884~1970]는 충주시 금가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무관 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고, 안동 분견대의 부위(副尉)로 있다가 부대를 이탈하여 의병 봉기를 꾀하던 이강년(李康秊)에게 의탁하여 의병 항쟁에 몸을 던졌다. 1907년(순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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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백학선(白鶴善)[?~1908]은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다. 게릴라전을 통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고 군수 물자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순종 2) 5월 6일 청풍의 방흥동[현 제천시 청풍면 방흥리]에서 25명의 부하와 함께 숙영하다가 충주 수비대의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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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의 이강년 의진과 연합하여 활동한 의병장. 변학기(邊鶴基)는 본관이 원주(原州)이고, 승려 출신으로 일찍이 군대에 입대하여 1907년(순종 1) 경에는 하사로 승진하였으며 강원도 지역에서 근무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영남 지역에서 창의(倡義)를 결심하고 경상북도 일대의 지사(志士)들에게 격문을 보내 해산 군인과 농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영좌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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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을 기해 충청북도 제천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제천은 항일 의병의 전통이 있는 곳이었으므로 일제에 대한 저항감이 높았다. 무단 통치를 겪으면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전통적인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으로 인하여 고종(高宗)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서가 높았다. 이러한 가운데 신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만세 운동을 주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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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은(景殷·敬殷), 호는 경암(敬菴). 서상렬(徐相烈)[1854~1896]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한 무인 출신이다. 임오군란 후 묄렌도르프가 등용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나아갔다가 이후 제천으로 낙향한 뒤 장담마을로 이주하여 유중교(柳重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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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경재(敬哉), 호는 관수재(觀水齋). 서상무(徐相懋)[1856~1925]는 제천시 덕산면 선고리에서 태어났다.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진압군을 일으켜 동학 수령을 체포한 공로로 포상을 받았으며, 제천의 을미 의병에 참여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이끌고 만주 지역으로 건너간 이후 벼슬길에 올라 순릉참봉(順陵參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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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복초(復初). 서상업(徐相業)은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에서 살았다.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좌종사로서 가담하였다. 주로 의병을 후원하는 일을 하였는데, 제천·단양·문경 일대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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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유(子由). 서상철(徐相轍)[1860~1896]은 청풍의 국사봉 아래 안간이마을에 살았다. 장담에서 유중교(柳重敎)가 주관하는 강회에 참석하던 보수적 유생으로, 1894년(고종 31) 가을 안동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청풍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패배한 후에 은거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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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 정해문의 문집. 정해문(鄭海文)[1888~1946]의 본관은 영일이며, 자는 윤명(允命), 호는 소당(小堂)이다.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며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에게 수학하였다. 1974년 문인이었던 오완근(吳浣根) 등이 중심이 되어 출판하였다. 『소당집(小堂集)』은 석인본으로,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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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호좌의진 의병 대장 유인석의 의병 활동 관련 자료를 모은 책.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본관은 고흥이며,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이다.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출신이다. 유중곤(柳重坤)의 아들이며 유중선(柳重善)에게 입양되었다. 14살 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하였으며, 그 뒤 김평묵(金平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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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손영국(孫泳國)은 충주의 대소원 출신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는데, 단발령 이후 의병이 일어날 즈음 음성 의병장 윤의덕의 막하에서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나중에 죽산 의병장을 자처하면서 독립하여 개화를 두둔하는 박곽산을 베었고, 충주 쇠꼬지에서 적을 만나 싸워 14명을 베었다고 한다. 제천에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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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손재규(孫在奎)는 원주의 참위(參尉)로 복무하던 중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의 조칙이 내려지자 민긍호(閔肯鎬)와 함께 해산 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진위대 무기고에 있던 무기를 병사들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우리가 만일 원주 읍내에서 교전하면 무고한 백성이 많이 살상되리라”고 하면서 부대를 인솔하여 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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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출신의 문인이자 의병장인 정운경의 문집. 정운경(鄭雲慶)[1861~1908]의 본관은 영일, 자는 화유(和有), 호는 송운(松雲)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태어났으며,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운경이 남긴 많은 문적이 소실되었으나 후에 종손인 정원태(鄭元泰)가 수습하여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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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자양영당에 있는 『화동강목(華東綱目)』의 판목. 『화동강목』 판본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제자인 김평묵(金平默)[1819~1891]과 유중교(柳重敎)[1832~1893]가 중국 송(宋), 원(元) 시대의 전적과 고려 시대의 전적을 모아 기록한 『화동강목』를 간행하기 위해 제작한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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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에 있는 개항기 애국지사의 묘역. 제천시 고암동 산28-9번지, 일명 고래미 장골에 위치한다. 제천 시내에서 영월 방면으로 국도 38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태백선 장락역 건널목이 나오는데, 순국선열 묘역(殉國先烈墓域)은 장락역 건널목을 지나 동쪽으로 800m 거리에 자리한다. 개항기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거의(擧義)한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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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 이배인의 문집. 이배인(李培仁)[1873~1945]의 본관은 전주, 자는 학연(學淵), 호는 술헌(述軒)이다. 강원도 춘천군 남산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이다. 이배인의 글은 여러 곳을 유리하면서 산실(散失)되었으나 후에 아들인 이문백(李文白)이 선친의 원고를 수습하여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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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응삼(應三), 호는 학습재(學習齋). 아들로 신재교(辛在敎)가 있다. 신광묵(辛光默)[1872~1949]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고, 1907년(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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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신기영(辛基泳)[1858~1907]은 제천시 청풍면 상천리에 살던 선비로, 1907년(순종 1)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주로 소백산 일대의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1907년 예천의 대평(代坪)시장에서 문경 수비대와 경찰의 토벌대가 싸울 때 참여하였다가 14명의 부하와 함께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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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신명희(辛明熙)는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7년(순종 1)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퇴위하는 변을 당하여 재차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을 좇았다. 숙부인 신숙(申橚)과 함께 대장 참모로 종군하였으며, 9월 중순 싸리재 전투와 10월 초순 단양의 죽령 전투 등에서 분전하였다. 11월 복상골 전투에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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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평산(平山). 이강년 의진의 대장 참모로 활동한 신명희(辛明熙)가 조카이다. 신숙(辛橚)[1843~1926]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의병을 일으킨 동향의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강년이 제천 의진의 유격군으로 합류한 후에는 수안보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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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영삼(靈三·英三), 호는 모양(慕陽). 신지수(申芝秀)[1854~1904]는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제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하는 의진이 붕괴되고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영월에서 출범할 때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신지수가 제천 인근 지역에서 모아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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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암(島菴). 신태식(申泰植)[1864~1932]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내부 주사(內部主事)와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질 때 문경의 농암 장터에서 일본군 밀정을 총살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96년(고종 33)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의병을 해산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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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 신태원(辛泰元)[?~1907]은 본관이 평산(平山)이며, 제천 청풍의 한양지마을에 살던 선비로 이강년(李康秊)의 오랜 동지였다. 1907년(순종 1) 봄,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숨겨 주고 치료해 주었다. 그해 여름에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강제 퇴위하였을 때 이강년이 다시 봉기하자 후군 부대를 이끄는 장수가 되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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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성옥(成玉). 아버지는 심선순(沈宣順)이다. 심문택(沈文澤)[1882~1955]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사동리에서 태어났으며, 21세에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노목(老木)으로 이사하였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가담하여 좌종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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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안성해(安成海)는 권관(權管) 출신의 전직 관료로,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의병으로 소모된 농민들을 훈련시키는 조련장을 하다가, 곧 우군장을 맡았다. 지역에서 개화 정책을 독려하던 충주관찰부를 공략하고 호좌의진이 기세를 올릴 때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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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夏史). 아버지는 화서학파와 교류하던 지평의 선비 안종응(安鍾應)이다. 안승우(安承禹)[1865~1896]는 동향의 화서학파 학자인 이근원(李根元)에게 배우다가 이근원의 스승인 유중교(柳重敎)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장담(長潭)에서 강학하던 유중교가 별세한 이후로는 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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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을 지원한 유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성(呂聲), 호는 퇴앙(退央). 아들로 의병 운동을 펼친 안승우(安承禹)가 있다. 안종응(安鍾應)[1845~1906]은 경기도 지평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에 두루 뛰어난 학자였으며, 척사론을 주장하는 화서학파와 일찍부터 교류하였다. 단발령 이후 지평 고을에서 이춘영(李春永)과 김백선(金伯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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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안춘흥(安春興)[1883~?]은 지금의 제천시 덕산면 선고리에서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던 때 다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합류하여 종군하였다. 새로 들어온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교련관(敎鍊官)으로 활동하였는데, 주로 이강년 부대의 후군장인 신태원(辛泰元)의 휘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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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양동환(梁東煥)은 본관이 나주(羅州)이며, 을미 의병 당시 이강년(李康秊)과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9년(순종 3)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주 어등산(魚登山)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대파하고 황룡강(黃龍江) 유역에서도 분전하였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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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엄기섭(嚴基燮)은 영춘 사람으로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유인석(柳麟錫)이 이끈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에서 영남 지역의 의병을 독려하고 연대를 추진하기 위하여 파견한 소토장 서상렬(徐相烈)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나중에 호좌의진이 근거지인 제천을 관군에게 빼앗기고 서북 지역에서 재기하려고 부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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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이자 일본군에 귀순한 인물. 오경묵(吳敬默)은 오정묵(吳正默)이라고 기록된 경우도 많다.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횡성 관아의 수순교 겸 포수계장(首巡校兼砲手契長)이었다. 1907년(순종 1) 여름 원주 진위대가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할 때 20여 명의 포수와 함께 민긍호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민긍호 부대, 정대무 부대 등 여러 의병 부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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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오덕문(吳德文)[1886~?]은 청풍의 수산면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 김운선(金雲仙)이 이끄는 의병 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김운선 및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경상북도 순흥의 소천시장에서 심삼성을 구타하고 군수 물자를 빼앗았다. 1909년(순종 3) 체포된 후 강도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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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오문룡(吳文龍)[?~1896]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포수로 종군하였다.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과 함께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나섰다가 청풍의 서창(西倉)에서 수안보로 가는 장고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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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 권섭의 문집. 권섭(權燮)[1671~1759]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조원(調元), 호는 옥소(玉所)·백월(百越)이다. 본래 한양에 거주하다가 정치에 환멸을 느껴 1714년 당시 큰아버지 권상하(權尙夏)가 있는 청풍 황강리로 낙향하였고, 말년에는 제천 봉양에 거주하였다. 여기에서 권상하의 학풍을 시풍으로 계승하였다. 산수 유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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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우규하(禹圭夏)[?~1896]는 단발령 이후에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포수로 종군하였다.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과 함께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나섰다가 청풍의 서창(西倉)에서 수안보로 가는 장고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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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단양(端陽). 자는 이존(而尊). 우기정(禹冀鼎)은 제천의 백평(柏坪)[현 제천시 동현동 백배미]에서 살았다. 무과에 급제한 후 무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여 제천을 장악하고 충주를 공략하러 나섰을 때 제천의 민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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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端陽). 호는 단운(檀雲), 이명은 우연준(禹連俊). 아들로 우대영(禹大榮)을 두었다. 우덕순(禹德淳)[1879~1950]은 어려서 상경하여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독립 협회 등 애국 계몽 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4년(고종 41)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연초 행상을 하다가 안중근·이범윤 등과 만났다.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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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우재봉(禹在鳳)[?~1896]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포수로 종군하였다. 의진의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에 호응하여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나섰다가 청풍의 서창(西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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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우필규(禹弼圭)는 평창에 살았으며,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에 임명되었다. 충주성을 점령하였던 호좌의진이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 충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파랑령[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마을 서쪽의 조백석골에서 백운면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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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성문(聖文), 호는 옥파(玉坡). 원규상(元圭常)[1868~?]은 제천시 봉양읍의 공전마을에 살던 선비이다.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출범할 때 전투 부대 중 하나인 좌군을 이끄는 좌군장으로 참여하였고, 호좌의진이 충주에서 돌아와 제천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벌이던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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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원덕상(元德常)은 본관이 원주(原州)이며, 지금의 제천시 봉양읍에서 살았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출신의 양반으로 친척인 보산에 살던 의병론자 원도상(元道常)과 왕래하면서 기맥을 통하였다. 의병 활동을 하면서부터 이름을 원건상(原建常)으로 고쳤다고 한다. 1905년(고종 42) 원용팔(元容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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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을 지원한 의병론자.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운거(雲居), 호는 치당(恥堂). 원용갑, 원용대, 원용일, 원용현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의병 운동을 펼쳤다. 원도상(元道常)[1848~1937]은 영춘의 보발마을에 살던 유학자이다. 재산가이었지만 배일사상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인근의 의병 지도자인 정운경(鄭雲慶)·장익환(張益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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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치화(致和·穉和), 호는 서암(恕菴). 의병 운동을 한 원용팔(元容八)이 육촌 동생이다. 원용정(元容正)[1860~1905]은 유인석(柳麟錫)의 제자이며, 유중교(柳重敎)가 강학하던 제천의 장담마을에 출입하면서 화서학파와 인연을 맺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처신을 의논할 때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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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원용석(元容錫), 자는 복여(復汝), 호는 삼계(三戒). 원용팔(元容八)[1862~1906]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梨湖)에서 무장의 후예로 태어났으며, 이근원과 유중교(柳重敎)에게 나아가 배웠고 장담에도 드나들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의병이 일어날 때 여주에서 봉기한 심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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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원우규(元友珪)는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단양군수, 청풍군수 등 친일 내각의 지시만을 받드는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1896년(고종 33) 2월 충주성을 공략한 이후 관찰사를 베고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호시탐탐 충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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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형백(瀅伯), 호는 하정(荷汀)·민와(敏窩). 원철상(元哲常)[1877~?]은 제천의 대미[현 제천시 봉양읍 미당리] 또는 동산(銅山)에 살았다고 한다. 장담에 출입하던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화서학파 학자들과 시국관을 공유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지도자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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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후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있는 월악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 해방 이후 6·25 전쟁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남한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좌우 갈등이었다. 이러한 좌우 갈등이 가장 격렬하게 표출된 것이 빨치산 문제였다. 제천 지역에서는 1946년 가을부터 좌익 세력이 모험 노선으로 치닫게 되고, 제천이나 충주에서 미군정에 반대하여 봉기했던 이들이 경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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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리는 제천시 한수면의 면소재지다. 한수면사무소는 원래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충주댐 공사로 인해 1984년 6월 송계리로 이전하였다. 제천에서 충주 수안보 방향으로 청풍호를 끼고 가다가 월악교가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자락에 송계리가 위치한다. 또 충주 수안보에서 제천 방향으로 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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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유계형(柳桂馨)[1877~?]은 제천의 덕산면 선림동(仙林洞)에 살던 상인이다. 군대 해산 이후 제천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조동규의 부하로 종군하여 문경·예천 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뒤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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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유금봉(劉今鳳)은 제천시 수산면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제천에서 다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포군으로 참여하였다. 제천시 수산면의 다불리(多佛里), 두무산(杜舞山) 등지에서 단독으로 일본군 수개 중대와 접전할 만큼 용맹무쌍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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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유기백(劉基伯)[1869~?]은 충주시 산척면 비석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된 뒤 이강년(李康秊)이 다시 봉기하였을 때 중군장을 맡았던 안성해(安成海)의 참모장으로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친일파를 베고 군수 물자를 거두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년 뒤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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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유덕삼(柳德三)[1878~1909]은 영춘군 가야면 여천리에 살던 인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순종 1) 여름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다. 주로 이강년(李康秊)과 원건상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초기에는 총기를 가진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청주·보은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순종 2) 12월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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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천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재(聖載).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유사눌(柳思訥)의 17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은기(柳溵基)이며, 아버지는 유흥남(柳興南)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유순철(柳舜喆)[1872~1949]은 청풍 황석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과 『주역(周易)』을 공부하여 통달하였다. 일제 강점기 서당에서 한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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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초명은 유춘혁(柳春赫), 자는 우양(禹陽)·홍일(弘一), 호는 임당(任堂). 유흥이(柳興彛)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유의혁(柳毅赫)[1863~1905]은 의당 박세화(朴世和)의 문인으로, 박세화의 명에 따라 이름을 바꾸고, 정사를 지어 일생 동안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집으로 『임당유고(任堂遺稿)』가 있다. 『임당유고』는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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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아버지는 유중곤(柳重坤)이다. 14세에 종숙인 유중선(柳重善)에게 입양되었다. 유인석(柳麟錫)[1842~1915]은 춘천의 가정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이항로(李恒老)·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 화서학파 거유들에게 차례로 배웠다. 스승인 유중교가 말년에 강학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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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후학을 양성한 문신. 본관은 고흥(高興). 초명은 유맹교(柳孟敎), 자는 치정(穉程), 호는 성재(省齋). 아버지는 진사 유구이다. 유중교(柳重敎)[1832~1893]는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이항로의 사후에는 김평묵(金平黙)을 스승으로 하였다. 1876년(고종 13), 1882년(고종 19)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과 사헌부 지평에 각각 제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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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원평(原平), 호는 도진(桃津). 유치경(兪致敬)[1848~1901]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으며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다. 장담에서 개최된 유중교의 강학에 참석하면서 문하에 출입하였다. 유중교의 시문집인 『성재집(省齋集)』 발간에 앞장섰다. 1895년(고종 32)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신석원·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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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유해붕(柳海鵬)은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한 전직 관료 출신으로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다. 군기감, 또는 기계 감독을 맡아 기존의 각궁(角弓)을 소뇌[弩弓]로 개조하는 등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는 데 힘쓴 결과 많은 성과를 올려 찬사를 들었다. 을미 의병 당시 호좌의진에서 활약하던 원용팔(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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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정치인. 유홍렬(柳鴻烈)[1907~1966]은 본관이 문화(文化)로, 수원공립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제천군 재무 부서에서 근무한 뒤 청풍금융조합·주문진금융조합·문막금융조합에서 서기로 일하였고 해방 후에는 청풍면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5월 10일 정부 수립 이후에 시행된 최초 민의원 선거에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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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효백(孝伯), 호는 외당(畏堂). 유인석(柳麟錫)의 육촌 형이다. 유홍석(柳弘錫)[1841~1913]은 단발령 이후인 1896년(고종 33) 초 춘천에서 이소응(李昭應)·유중락·유봉석 등과 봉기하여 가평과 춘천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춘천 의진이 무너진 후로는 제천의 호좌의진에 합세하여 유인석 휘하에서 서무를 관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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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민족상잔의 전쟁인 6·25 전쟁에서 제천은 전황에 따라 몇 차례나 공산군과 국군 및 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많은 희생과 갈등을 겪었다. 6·25 전쟁 초기에 강원도와 충청북도 북부 지역 방어는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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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택(敬澤), 호는 무곡(茂谷). 아들로 윤지수(尹芝秀)가 있다. 윤기영(尹起榮)[1856~1907]은 원주의 호저면 무장리 출신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잠시 말단 관료를 지냈으며, 귀향 후 동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단발령 이후 봉기한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원주 출신의 의병들을 이끌고 이강년(李康秊)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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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만년에 제천에 거주한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위(性謂). 증조할아버지는 윤이현(尹彛鉉)이고, 할아버지는 윤태주(尹泰周)이며, 아버지는 윤병정(尹秉鼎)이다. 어머니는 서상옥(徐相沃)의 딸 대구 서씨(大丘徐氏)이고, 부인은 김영수(金永壽)의 딸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윤명섭(尹命燮)[1851~?]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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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윤성호(尹聖鎬)[?~1896]는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하였을 때 중군장 안승우(安承禹)의 막하에서 우익장으로 활약하였다. 선봉장이던 김백선(金伯善)이 군기 문란죄로 처형된 이후에 지평 출신의 포군 지도자 서석화, 선봉장 종사관 민의식 등이 반발하여 의진을 이탈하여 김백선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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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윤용구(尹容九)는 제천에 살았으며,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에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10월 영월 거석리에 의진이 주둔하였을 때 우선봉장인 백남규(白南奎)가 일시 휴가를 얻어 귀가하게 되어 부대 지휘부를 개편하였는데, 이때에 독전장(督戰將)에 임명되었다. 이후 단양·영춘 등 소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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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군서(君瑞), 호는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1854~1924]은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1889년(고종 26)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주역』를 공부하던 40세에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를 만났다. 윤응선은 본래 양평 출신인데, 병인양요 이후 조부를 따라 청풍 장선으로 이주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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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서 1911년 사이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을미년[1895년] 말의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이 봉기한 이래 1905년(고종 42)의 을사의병, 1907년(순종 1)의 정미의병에 이르기까지 제천 지역에서는 의병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895년(고종 32)에 있었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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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장인 유인석의 문집.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본관은 고흥이며,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이다.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중곤(柳重坤)이며 유중선(柳重善)에게 입양되었다. 14살 때 화서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하였으며, 그 뒤 김평묵·유중교(柳重敎)에게 수학하였다.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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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樂寅), 호는 운강(雲崗·雲岡). 아버지는 이기태(李起台)이다. 이강년(李康秊)[1858~1908]은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태어났다. 1880년(고종 17) 3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 선전관이 되었으나, 개화 정책에 불만을 갖고 낙향한 이후 잠시 동학 조직과 관련한 의병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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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경기(李敬器)는 제천의 장담에 살았다. 삼화부사를 지냈으며, 무관의 후예로 병서에 능통하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분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삼수 군수를 끝으로 퇴임하고 향리에 머물다가 단발령이 내려진 뒤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봉기하자 참여하였다. 친일 군수들을 처단하고 기세를 올린 호좌의진이 관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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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사회 운동가이자 교육가.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노촌(老村).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집안의 후손이다. 이구영(李九榮)[1920~2006]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뒤늦게 신학문을 접하였다. YMCA 청년회 학교 중등부에서 수학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잠시 다녔다. 황한의학원에 입학하여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를 접한 뒤 항일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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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우문(于文)·명오(明五), 호는 광암(廣菴)·광거재(廣居齋). 이규현(李奎顯)[1874~1951]은 단양 품달마을에 살았다.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숙부이면서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인 이필희(李弼熙)에게 배웠고, 후에 장담에 출입하면서 유중교와 유인석(柳麟錫)에게도 배웠다.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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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이근백(李根伯)[?~1908]은 1908년(순종 2) 1월 초, 제천의 명암리에 거주하면서 권영선(權永先)·김윤학(金潤學)·이동인 등과 의병의 무기를 감추고 있었는데, 이 일이 영천 수비대에 발각되는 바람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운학동[현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제천은 군대 해산 후 제천 의병의 주력 부대가 1907년(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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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여(翰汝)·효백(孝伯), 호는 명와(明窩). 이기진(李起振)[1869~1908]은 충주의 하곡[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에게 배웠으며, 을미 의병 당시 홍선표(洪選杓)·정화용 등과 함께 유인석의 종사로 활약하였다. 충주성 전투와 제천에서 패한 후 서행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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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기하(李起夏)[1897~?]는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이후 제천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돌아온 이범우(李範雨)의 주도로 권종필(權鍾弼), 전필현(全弼鉉) 등과 4월 17일 제천 장날에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는데, 중간에 발각되어 관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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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이달(李達)은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포수로 종군하여 수많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같은 해 겨울 이강년 부대는 탄환이 고갈되고 일진회원들을 앞세운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세에 시달리고, 12월 중순에는 단양의 복상골[단양군 어상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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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해수(海水), 호는 산재(汕齋). 아버지는 이부의(李孚儀)이다. 이만원(李萬源)[1867~1943]은 박세화(朴世和)에게 배웠는데, 국운이 기울자 월악산에 들어가 병서를 읽으며 의병 봉기의 뜻을 품었다. 단발령 이후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을 때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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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맹삼(李孟三)[1867~1919]은 일명 이희민(李喜敏)이라고도 한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이후 제천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돌아온 이범우(李範雨)의 주도로 4월 17일 제천군 제천면 장날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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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군에서 일어난 을미의병 이소응의진 및 개항기 제천 호좌의진에서 활동했던 의병. 이면수(李勉洙)[1833-1898]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의(義)를 중하게 여겨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을미의병의 주역이었던 습재 이소응 장군의 종조부(從祖父)로서 1896년 1월경 강원 춘천군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통문을 돌려 독려하고 이소응 의진에서 군사장으로 활동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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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명로(李明魯)는 주천 사람으로 진사에 오른 선비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가 이어질 때 제천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충주성까지 나아가서 기세를 올리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온 이후, 유인석은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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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이명상(李明相)[?~1909]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출신이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을 일으켜 단양·청풍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청단장의장(淸丹仗義將)을 자처하였다. 이때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군사(軍師) 이진하(李晋夏), 중군장 김규철(金奎喆), 좌군장 민영팔(閔泳八), 우군장 이영승, 서기 이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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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주윤(李柱允), 자는 우문(又文), 호는 몽학(夢鶴). 이명하(李命夏)[1878~1921]는 경기도 광주에서 왕실의 후예로 태어났다. 위정척사론(衞正斥邪論)을 견지하던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가 근대 교육 기관으로 변신 중이던 성균관에서 한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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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문흠(李文欽)은 언양 현감, 상주 영장, 장진부사 등을 역임한 전직 관료로서 제천시 한수면 서운에 살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공략할 때 민병 130여 명을 모집하여 호좌의진을 후원하였다. 민병은 일반 농민으로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포군과는 달랐지만 농기구를 무기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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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사섭(士攝), 호는 택옥(澤玉).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호좌의진에서 전군장·중군장으로 활약한 안승우(安承禹)가 사위이다. 이민정(李敏政)[1845~?]은 제천의 신월리에 살던 진사로, 단발령 이후 의병 운동에 적극 나서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을 시종 도왔다. 의병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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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현(景賢). 이범규(李範圭)[1874~?]는 민영기가 설립한 중교의숙(中橋義塾)에서 영어·일어 등을 공부하였다. 29세 때에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 내부주사가 되었다. 덕수궁 의효전(懿孝殿) 사승(祀丞)을 역임하던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자 이를 반대하는 동우회를 조직하여 군중집회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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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범우(李範雨)[1892~1969]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며, 부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천군 잠업계 조수로 근무하였다. 1919년 봄 제천군 대표로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갔다가 평소에 사숙하던 최린(崔麟)을 만나 만세 운동을 권유받았다. 최린은 3·1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계열의 인사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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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보경(寶卿), 호는 조은(釣隱). 이범직(李範稷)[1868~1896]은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간부로 활동하다가 순국한 ‘육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대로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는데, 뒤늦게 뜻한 바가 있어 유중교(柳重敎)의 제자가 되었다. 을미 왜변 이후, 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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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병선(李秉善)[?~1896]은 글 읽던 선비 출신으로, 본관이나 생년은 알 수 없다. 단발령이 내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서 활약하였다.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충주성을 공략하는 등 기세를 올리던 호좌의진이 관군의 공세 앞에 무너져 근거지로 삼던 제천마저 빼앗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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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 이상필(李相弼)[1924~1975]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정학부에서 수학하였으며 1937년 약관의 나이에 시집 『잔몽(殘夢)』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어상천국민학교에서 근무하였다. 해방 후에는 고향인 제천에서 유학생 출신 청년들로 꾸려진 제천군 치안유지위원회 선전대에서 활동하였고,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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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성구(李晟九)[1924~1978]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인을 전쟁터로 끌어내던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산시성[山西省] 안읍지구(安邑地區)에 주둔하던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4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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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광국(光國). 이세영(李世榮)[1869~1951]은 지금의 제천시 두학동에 살았다. 단발령 이후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고종 42) 정운경(鄭雲慶)이 봉기할 때도 협조하였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에는 이강년(李康秊)이 재건한 호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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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사정거사(思靖居士). 후에 이의신(李宜愼), 이직신(李直慎)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소응(李昭應)[1852~1930]은 춘천에서 태어나서 성재 유중교(柳重敎)에게 배웠다. 유중교가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심설(心說)을 보완한 것을 계기로 화서학파가 양분될 정도의 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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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좌경(佐卿), 호는 창주(蒼洲). 아버지는 이강년(李康秊)이다. 이승재(李承宰)[1881~1917]는 문경에서 태어났다. 단발령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부친을 좇아 의병에 가담하여 서상업(徐相業) 등과 부친을 보좌하였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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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약(文若)·명칠(命七), 호는 소산(小山). 이완하(李完夏)는 단양에서 살았다.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 장의장에서 활동하였다. 장의장은 단양 지역의 의병으로 조직된 의병 부대를 일컫는데, 장림(長林)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였다. 호좌의진의 중군장으로서 의진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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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이용업(李龍業)[1860~1909]은 영춘 어상천 사기막에 살던 농민으로,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봉기한 수많은 의병 부대 중에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가담하여 포군으로 활약하였다. 영춘·제천·충주·단양 등 소백산 자락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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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준(李容俊)[1907~1946]은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1925년 3월 제천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제천군청에 근무하다가 신간회에 가담하는 등 민족 운동을 하였다. 1930년 『동아일보』 봉천지국(奉天支局) 보급원으로 만주에 갔다. 이듬해 원심창(元心昌)의 권유에 따라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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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에서 활동한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용태(李容兌)[1890~1964]는 호는 단암(檀菴)이며, 충주시 산척면 광동 출신으로 어려서 봉양으로 이사하였다. 임의상(林宜常)·이소응(李昭應) 등 화서학파 학자들에게 배웠으나 나라가 망한 후로는 구학문으로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개혁에 뜻을 두었다. 24세 때 근좌면 면서기로 공직에 나섰으며,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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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정치인이자 작가. 이우태(李愚兌)[1922~1997]는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이석영(李錫永)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운보통학교,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옥천국민학교에서 촉탁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 후 일본군에 징발되어 남양 군도에서 연합군 포로 감시단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 국학대학[현 고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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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원하(李元廈)는 자는 치택(致澤)이며,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일찍이 오위의 사과(司果)를 거친 전직 관료로, 총을 잘 쏘았고 동학 농민 운동에도 가담한 적이 있으며 향중에 중망이 높았다고 한다. 단발령 이후 지평 출신의 포군을 기반으로 봉기한 제천의진의 지도자 안승우(安承禹)의 권유를 받고 의병 운동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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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전투에 참가한 관동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진(共振), 호는 중남(重南). 일명 이준영(李竣榮) 이인영(李麟榮)[1867~1909]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내룡리 출신이다. 1895년(고종 32) 말 단발령이 발표된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원주에서 봉기하여 주로 여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과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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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치심(致心), 호는 항재(恒齋)·옥산(玉山). 이정규(李正奎)[1865~1945]는 본래 소론 집안인 탓에 송시열의 학문을 대단하지 않게 보았는데, 우연히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보고 감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주장하는 화서학파에 입문하게 되었다. 안승우(安承禹)와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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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이정의(李正義)[1851~1933]는 본관이 전주(全州)로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선달이었는데,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발표되자 송지영(宋之永)과 더불어 장충식의 집에서 의병 통문을 작성하였다. 후에 단양 포군 30여 명을 데리고 충주성의 유인석(柳麟錫)을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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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기중(紀中), 호는 관의재(寬毅齋). 이조승(李肇承)[1873~1900]은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에 살았다. 일찍이 이인구(李寅龜)·지운상(池運象) 등에게 배웠고, 나중에 유중교(柳重敎)가 장담으로 내려오자 그 문하에 들어가서 배움을 청하였고 유치원(兪致元)에게도 배웠다. 유중교가 세상을 뜬 후에는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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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천(應天), 호는 석포(石浦). 아버지는 이규수(李圭壽)이다. 이종국(李鍾國)[1860~1939]은 박세화(朴世和)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이 친일 관료들을 척살하고 충주성을 장악하였을 때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식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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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말년을 보낸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총선(總仙). 아버지는 병조 판서 이규철(李圭徹)이며, 이규남(李圭男)에게 입양되었다. 동생은 군부 대신 이종건(李鍾健)이다. 이종승(李鍾承)[1828~?]은 1858년(철종 9) 황해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에 의해 황해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군권을 종실이 장악하여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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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주면(李柱冕)[1900~1947]은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등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내의 역량을 동원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주면은 1919년 12월 서울 인사동에 거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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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재(大哉), 호는 휘암(徽菴)·은구와(隱求窩). 명문가로 이름 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후손이다. 동생으로 유인석(柳麟錫)의 종사로 활동한 이조승(李肇承)이 있다. 이주승(李胄承)[1870~1946]은 선공감 감역관을 지냈으며, 1895년(고종 32) 제천 을미의병 때 가문의 재력과 중앙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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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장. 이중봉(李重鳳)[1871~1896]은 본관이 달성(達成)으로, 청풍 도화동(桃花洞)에서 살았다.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 분노하여 수많은 의병 부대가 봉기할 때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제천에서 의병을 주도하였던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 참여하여 후군장 및 중군장의 소임을 맡았으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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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풍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화좌(華佐). 아은(啞隱) 이정악(李挺岳)의 후손이다. 이직현(李稷鉉)은 헌종 때에 음사로 관직에 들어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여러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부여 영강정(映江亭)을 건립하였고, 1870년(고종 7) 청풍 부사로 재직할 때에는 제천 청풍 한벽루, 제천 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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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해조(海朝), 호는 동애(東涯).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활동한 이만원(李萬源)이 동생이다. 이진원(李進源)[1856~1935]은 제천시 덕산면 억수동에 살았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순종 1) 봄 제천 지역을 중심으로 재차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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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오(明五), 호는 백농(白農). 이진하(李晋夏)는 단양에 살던 선비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은 친일 군수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을 공략하는 한편, 주변의 여러 고을을 해방구로 확보하였다. 이때 호좌의진 대장 유인석(柳麟錫)은 장악하고 있던 고을마다 수성장을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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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한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신(子信), 호는 신와(信窩). 할아버지는 이직신(李直愼)[이소응]이고, 아버지는 이배인이다. 이초용(李超鎔)[1909~1992]은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해방 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정착하여 40년여 동안 화서학파(華西學派)와 의병론자들의 정신적 귀의처인 자양영당(紫陽影堂)을 수호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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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우삼(友三), 호는 괴은(槐隱). 이춘영(李春永)[1869~1896]은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출신이다. 유중교(柳重敎)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그의 척사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춘영에 대해서는 이념 지향적이었던 제천 의병의 지도부 속에서 예외적으로 실무적인 지도자였고, 일본의 포위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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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관료이자 정치인. 본관은 전주(全州). 일본식 이름은 송택태용(松澤泰鎔), 송택성선(松澤成宣)이다. 이태용(李泰鎔)[1909~1968]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 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1935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임정과에 임명되면서 관계에 입문한 후, 1937년 양구 군수와 1939년 평강 군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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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공후(公厚). 이필근(李弼根)[1844~?]은 유인석(柳麟錫)이 춘천에서 제천으로 이주한 후 거처하였던 구곡마을에 살았다. 선공감 감역을 역임한 전직 관료로 장담에서 이루어지는 강회에 세 아들을 보내 배우게 하고, 자신도 향음례나 강회에 참석할 만큼 화서학파 선비들과 시국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였다.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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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본명을 숨기고 춘삼(春三)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필익(李弼翼)[?~1896]은 단양 평동 출신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진압에 앞장섰다. 을미의병 당시 서상렬(徐相烈)을 따라 영남으로 나아가 병력을 소모하였고, 단양 영춘 지역에서도 모병 활동을 하였다. 풍기의 백천에서 모병 활동을 하던 중 소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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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 이필희(李弼熙)[1857~1900]는 단양의 품달과 여주에 살았다. 무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유중교(柳重敎)를 만난 후 유학에 전념하였다. 을미년(1895)에 단발령 조치가 내려진 후 장담에서 처신을 두고 의병을 일으킬 것인가, 망명할 것인가, 자결할 것인가를 두고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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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문(敬文), 호는 청사(晴史).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이다. 이형구(李馨久)는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충주의 하곡에 살던 이기진(李起振)의 추천으로 의병 운동에 가담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다시 제천으로 돌아와 방어 전선을 펼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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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형우(李亨雨)[1890~1958]는 광복단(光復團)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다. 3·1 운동 후 창립된 광복단은 원래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서 비롯한 것으로, 박상진(朴尙鎭)·양제안(梁濟安)·우재룡(禹在龍)·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이 가담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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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희두(李熙斗)는 단발령이 내려진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이천에서 봉기한 김하락 의진에서 좌군장을 맡았다. 후에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활동한 호좌의진에서 분의장·좌군장·호위장 등 전투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1896년(고종 33) 4월 이후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이 청풍의 서창까지 이르자 홍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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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교육 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현(景賢), 호는 덕헌(悳軒). 아버지는 이교채이다. 이희직(李熙直)[1866~1922]은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인덕을 겸하여 물려받은 재산을 기울여 사회사업에 힘썼다. 신교육을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여겨 1906년 여름부터 계몽 운동가들이 활발히 전개한 여러 학회를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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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여러 사회 간접 자본을 확충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천 지역에서는 항일적인 색깔이 분명한 이범우(李範雨) 등이 주도한 3·1 운동, 제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 투쟁, 김학간·김정호 등이 주도한 제천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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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동일(東一). 족보에는 임도수(林道洙)라고 기재되었다. 임도봉(林道鳳)[1868~1896]은 제천시 수산면 도기마을에 살던 선비이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일본군에게 피살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단발령 이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제천에서 봉기하였고,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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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증약(曾若), 호는 순초(筍樵). 아버지는 임백헌이다. 이름의 한자 표기가 족보에는 석준(晳準), 『창의사실기(倡義事實記)』에는 석준(奭準)으로 나오는데,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과정에서 철준(哲準)으로 표기되었다. 임석준(任晳準)[1851~1907]은 지금의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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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경보(敬甫), 호는 신당(愼堂). 아들로 임병필이 있다. 임의상(林宜常)[1854~?]은 제천군 길고개[현 제천시 왕암동]에 살았다. 이소응(李昭應)이 주도하는 장담 강회에 출입하며 의병론자들과 뜻을 같이하였고, 1904년(고종 41) 말에는 유인석(柳麟錫)의 지시에 따라 일진회를 견제하기 위해 시행하였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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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제천 의병에 참가하였던 의병장 주용규의 시문집. 주용규(朱庸奎)[1845~1896]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자는 여중(汝中), 호는 입암(立菴)이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생부는 주기섭(朱箕燮)이며, 백부인 주종섭(朱宗燮)에게 입양되었다. 1963년에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손자인 주윤문(朱允文)이 유고를 수습하여 1931년에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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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있는 개항기 성리학자였던 유중교(柳重敎)의 강학소. 장담서사(長潭書社)는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유중교가 제천으로 옮겨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간으로서 현재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의 장담마을에 있는 유중교의 고택을 가리킨다. 장담서사는 화서학파 학자인 유중교가 춘천의 가정마을로부터 제천의 장담마을로 이주하면서 개설한 강학소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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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수겸(受謙), 호는 중재(中齋). 아버지는 호좌의진에서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직책인 사객(司客)이었던 장충식(張忠植)이다. 장익환(張益煥)[1866~1915]은 단양의 상진에 살았다. 유중교(柳重敎)의 제자인 이근원의 제자이다. 단발령 이후, 단양에서 의병을 준비하던 중 이춘영(李春永) 등이 봉기하여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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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장인식(張仁植)[1878~?]은 단양군 단양읍 별곡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춘 지역의 전투에서 1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에 맞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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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사이(事以), 호는 열은(洌隱). 아들로 단양 민병장과 장의진의 중군을 역임한 장익환(張益煥)이 있다. 장충식(張忠植)[1836~1901]은 단양 출신이다. 임오군란 때 민겸호가 피살되자, 그의 집에 출입하던 의리를 지켜 홀로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선공감 감역관, 사헌부 감찰 등의 직책을 받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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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필현(全弼鉉)[1894~?]은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이후 제천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돌아온 이범우(李範雨)의 주도로 이기하(李起夏)·권종필(權鍾弼) 등과 4월 17일 제천 장날에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준비 도중에 발각되어 관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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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숙경(叔景), 호는 석재(石齋). 정곽(鄭藿)[1856~1907]은 제천에 살던 선비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한 호좌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호좌의진의 후군장이던 신지수(辛芝秀)와 함께 의병에 뛰어들었는데, 군기감으로서 주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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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정병철(鄭炳喆)의 자는 수봉(壽鳳)이다. 평민 출신의 의병으로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경우이다. 단발령 이후에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영남 지방에 소토장으로 파견한 서상렬(徐相烈)의 휘하에서 중군 참모로 활동하였다. 좌부장(左副長)으로 제천 본진과 연락을 담당하였고, 조령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유격장 이강년(李康秊) 휘하에서 부총(副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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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덕(仲德·重德), 호는 소송(小松). 정술원(鄭述源)[1860~1931]은 많은 의병론자를 배출한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출신으로,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활동할 때 대장 종사로 활약하였다. 1905년(고종 42) 초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일진회를 제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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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 정연철(鄭淵哲·鄭蓮哲·鄭連哲)은 대한제국 군대의 상등병 출신이다.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 이강년(李康秊) 부대에 참여하여 후군장·우익장 등 전투 부대장을 맡았다. 12월 16일 영춘 복상골 전투 이후 의진이 북상하자 중군장 김상태(金尙台) 진영과 함께 뒤에 남아 영춘 지역의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봉화 방면으로 진출하여 계속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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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 정운경(鄭雲慶)[1861~1939]은 강한 재지(在地) 세력을 갖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재종순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빈한하여 영춘으로 이주하였으며, 관권이나 토호의 수탈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의협심을 내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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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백상(伯祥), 호는 계릉(桂陵). 정운호(鄭雲灝)[1892~1930]는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모여 사는 연일 정씨 문중 출신으로, 법부 주사를 지냈다. 향교에 깊이 관여하여 그가 작성한 명륜당 중건기문이 전한다. 단발령이 내려진 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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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한학자이자 교육가.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치화(致和), 호는 계산(桂山)·소암(昭岩). 할아버지는 정운호(鄭雲灝)이고, 아버지는 정구택(鄭九澤)이다. 정원태(鄭元泰)[1913~1993]는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의병 활동을 한 조부와 유지혁(柳芝赫)에게 한학을 배웠다. 1957년 제천에 대제중학교의 전신인 계림중학교를 설립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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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경존(景存). 정익(鄭瀷)[1860~1904]은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자 문중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의진에 참여하여 대장 종사로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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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정중택(鄭仲澤)[1879~?]은 제천의 서면 방하리[현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에 살았다. 원래 시위대 병사였는데, 1907년(순종 1) 여름 군대가 해산되자 이강년(李康秊)을 만나 의병 운동에 투신하였다. 원주·평창·영춘·단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은신하였다가 체포되어 유형 10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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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의 자선 사업가.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기서(岐西).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의 10세손이다. 정해봉(鄭海鳳)[1888~?]은 천성이 온후하고 인자하였으며, 친척들의 화목을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흉년이 들면 춘궁기에 100여 가구의 사람들에게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고, 사찰에까지 보조를 아끼지 않았다. 제천시 금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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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대재(大哉). 정해창(鄭海昌)[1885~1909]은 제천 서면(西面)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한 후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50여 명을 이끌고 동참하였다. 이후 이강년의 참모관과 좌군장, 이세영(李世榮) 진영에서 중군으로 활동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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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제천 지역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와 반 그리스도교의 사회 분쟁.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서 발생한 선교사 및 천주교인과 지방 관리, 토착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을 역사학계에서는 교안(敎案)이라고 한다. 박해로 일관한 조선의 천주교 정책은 1886년(고종 23) 맺어진 한불조약에 따라 사실상 변화를 맞았다. 선교사들은 국내 여행증이라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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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명동에 있는 엽연초 수납 업무를 취급하는 곳. 잎사귀를 자르지 않고 말린 담배를 지칭하는 엽연초(葉煙草)는 조선 시대인 1618년(광해군 10) 일본에서 전래된 이래 수익성이 높아 점차 경작이 확대되었다. 개항과 함께 일본에서 공장 생산된 담배가 들어오고, 1910년 한일 합병 이후에는 담배를 조세 확보의 한 방편으로 삼으면서 담배 재배를 통괄하는 엽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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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명동에 있는 제천 엽연초생산조합의 옛 사옥. 엽연초(葉煙草)는 잎사귀를 자르지 않고 말린 담배를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인 1618년(광해군 10) 일본으로부터 국내로 전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에는 주로 제한된 지역에서 자급자족을 목적을 위한 자가 생산 방식으로 경작되다 소비 증가와 높은 수익성으로 17세기 중반 이후 상업적 판매를 목적으로 경작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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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3·1 운동 이후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에 대비하자는 실력양성론이 대두되어 전국적으로 각종 문화 계몽 운동이 확산되었다. 충청북도 지역에서도 50여 개의 청년 단체가 조직되어 지역의 교육 및 문화·사회 운동에 적극 나섰다. 제천청년회도 그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의 하나로 지역 사회에서 교육을 비롯한 계몽 활동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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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충청북도 제천에서 결성되어 치안 유지 활동을 수행했던 민간 자치 조직. 제천군 치안유지위원회는 해방 직후에 한필수(韓弼洙)를 중심으로 제천에서 결성되어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활동하는 한편, 지역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총독부 권력이 붕괴되고 미군이 주둔할 때까지의 권력 공백기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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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조달승(曺達承)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일어난 호좌의진에서 총독(摠督)으로 활약하였다. 충주성을 공략할 때 박달재 쪽을 지난 주력 부대와는 별도로 후군장 신지수(辛芝秀) 등과 함께 청풍 쪽으로 은밀히 병력을 이동시켜 충주성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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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 조동교(趙東敎)[1878~1907]는 본관이 한양(漢陽)이다. 진위대(鎭衛隊) 소속으로 1907년(순종 1) 군대가 해산되자 6월에 박여성(朴汝成)과 의병을 일으켜 그 휘하에서 소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박여성 부대에서 독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청풍 의병 대장으로 일컬어졌다. 1907년 8월 15일 일본군이 제천으로 들어왔을 때, 이강년(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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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교육자이자 향토사 연구가. 조석득(曺石得)[1920?~1998?]은 제천의 향토사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민족 교육의 요람인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전에 제천공립보통학교[현 동명초등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민족청년단에서 청년 운동을 하였다. 교직에서 물러난 후 이상필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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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이필희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해사(海史). 조준교(趙駿敎)[?~1896]는 청풍 출신으로 담론을 잘하고 글도 많이 읽은 호걸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에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출신의 포군을 바탕으로 구성된 의병 부대가 제천으로 들어와서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새 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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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조후룡(趙後龍)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의 대표적 평민 출신 의병이다. 중군 안승우(安承禹) 친척 집안의 하인이었다고 하는데, 수안보 전투에서 이춘영(李春永)이 전사하였을 때 배시강과 함께 시신을 운구해 왔다. 후에 안승우의 지시를 빙자하여 김백선(金伯善)의 군사가 경작하던 논을 빼앗아 중군장 안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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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주광식(朱光植)은 본관이 신안(新安)이며, 제천의 백운에 살았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을 때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병력과 물자를 모집하는 소모장으로서 주로 영서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원주를 중심으로 활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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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주범순(朱範淳)[?~1907]은 1907년(순종 1) 여름, 군대 해산 이후에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부대에서 대장인 이강년, 또는 중군장 김상태(金尙台)의 종사로 활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1907년 11월 하순경 일진회원들을 앞세운 채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4연대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면서 이강년 부대는 단양의 영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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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여중(汝中), 호는 입암(立菴). 아들로 주현구(朱鉉九)와 주현삼(朱鉉三)을 두었다. 주용규(朱庸奎)[1845~1896]는 1845년(헌종 11)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이다. 스승이 장담으로 이주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제천으로 이주하여 장담의 선비들을 이끌었다.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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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신안(新安). 호는 치용(致容). 아버지는 호좌의진의 의병 주용규(朱庸奎)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현구(朱鉉九)[1869~1897]는 장담에서 강학하던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896년(고종 33)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부친을 좇아 의진에 나아갔으며, 충주성 전투에서 부친이 전사한 후에도 더욱 열성적으로 의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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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치강(致綱). 아버지는 을미 의병 당시 호좌의진의 대장 참모로 활동하다가 충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주용규(朱庸奎)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현삼(朱鉉三)[1877~1908]은 제천의 팔송에 살았다. 유인석(柳麟錫)을 좇아 배움을 청하며 의병의 후예로서 의리를 지켰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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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장 장익환의 문집. 장익환(張益煥)[1866~1937]의 본관은 인동이며, 자는 수겸(受謙), 호는 중재(中齋)이다. 아버지는 장충식(張忠植)이다. 유인석(柳麟錫), 정운경(鄭雲慶), 이강년(李康秊) 의병 부대에 참여하였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후손가에 전해 오던 관련 문건들을 모두 모아서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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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사원(士遠), 호는 춘성(春城). 지원영(池源永)[1872~1906]은 제천의 상풍마을에 살았다. 젊어서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장담의 유중교(柳重敎)와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지고 관찰사의 지시를 받은 단양 군수가 단발을 촉구하자 처족인 장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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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인 유제함의 문집. 유제함(柳濟咸)[1884~1960]의 본관은 고흥이며, 자는 사형(士亨), 호는 직와(直窩)이다. 생부는 유의석이며, 유인석(柳麟錫)의 양자가 되었다. 술헌 이배인과 회당 박정수에게서 수학하였다. 1990년 국민 훈장이 추서되었다. 필사본으로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유연수(柳然壽), 유남균(柳南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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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청풍 부사를 역임한 이기홍의 문집. 이기홍(李箕洪)[1641~1708]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여구(汝九), 호는 직재(直齋), 초명은 기주(箕疇)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이숙(李塾)이며, 외할아버지는 군수 송현(宋鉉)이다. 이지렴(李之濂)·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887년(고종 24) 이기홍의 7세손 이승근(李承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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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장 김태원의 문집. 김태원(金泰元)[1863~1932]의 본관은 해풍이며,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이다. 199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남아 있던 유문을 아들인 김성모(金性模)가 중심이 되어 편집하였으며, 성책된 문집은 『한말의병자료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에 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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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채동집(蔡東集)[?~1896]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신지수(辛芝秀)가 이끄는 후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 홍귀봉(洪貴鳳)·임도봉(林道鳳) 등과 충주의 광동마을[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광동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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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채찬(蔡燦)[?~1924]은 일명 백광운(白狂雲)이라 불렸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일이 이어지자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해 동안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10년 국권 피탈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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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본관은 영양(潁陽). 호는 후석(後石). 아버지는 천명선(千命善)이다. 천관우(千寬宇)[1925~1991]는 청주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면서 반계 유형원에 관한 졸업 논문으로 일찍부터 이름을 얻었다. 6·25 전쟁 때 대한통신사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사·조선일보사·민국일보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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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선경(善慶). 천보락(千普洛)[1852~1908]은 문경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동향 사람인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봉기하여 친일 지방 관료를 공격하였다. 문경에서 의병 활동이 여의치 않아 북상한 이강년이 제천 호좌의진의 유격장으로 참여하자 함께 이동하여 수안보와 조령 등지에서 활동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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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자선가. 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우현(禹玄), 호는 석거(石居). 선조는 명나라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여송 휘하로 조선에 출정하여 여러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도 전공을 세우고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이다. 천인봉(千仁鳳)은 청풍문화재단지에 세워진 자선비에 의하면 관직은 의관(議官)이었다. 의관은 1895년(고종 32) 중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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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최대옥(崔戴玉)[1867~?]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며, 제천시 청풍면 대류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종군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훗날 제천 일대에서 군수 물자를 징발한 것 때문에 체포되어 강도죄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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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최두익(崔斗翼)은 자는 성우(聖禹)이며, 지금의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진에 투신하였다. 단양의 황정(黃庭)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청주 감옥에서 복역 8년 만에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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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의 교육자.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만곡(晩谷). 아버지는 최상영(崔相暎)이다. 최병찬(崔炳贊)[1921~1999]은 경성사범학교 출신으로 25세 때 청주공립고등학교 교사로 교육계에 첫발을 디뎌, 청주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후 낙향하여 제천시 동명국민학교 교사를 시작하여 여러 중등학교의 교감과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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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송산(松山), 호는 청계(淸溪), 이명은 권태준(權泰俊). 최욱영(崔旭永)[1854~1919]은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민긍호(閔肯鎬)[?~1908, 개항기 의병장]에 호응하여 신림(神林) 안강리(安康里)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여러 곳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후에는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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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최중봉(崔中奉)은 호는 중봉(重峰)이며, 을미 의병 기간에 민용호를 중심으로 한 강릉 의병진에서 중군으로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이 남산 전투에서 패하고 서북행을 단행할 때 참여하였다가, 철원에서 적에게 체포된 뒤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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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추치경(秋致景)[?~1896]은 아명(兒名)이 추성손(秋聖孫)이며,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포수로 종군하였다. 의진의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李康秊)의 유격군과 함께 수안보를 공략하기 위하여 작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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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간행된 조선 후기 문인 정양의 문집. 정양(鄭瀁)[1600~1668]의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안숙(晏叔), 호는 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이다. 할아버지는 정철(鄭澈)이며, 아버지는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이다. 초시(初諡)는 정절(貞節)이었으나 뒤에 문절(文節)로 개시되었다. 정양은 병자호란 이후 태백산에 은거하였는데, 이후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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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활약한 문인이자 의병장인 안승우의 문집. 안승우(安承禹)[1865~1896]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夏史)이다. 아버지는 안종응(安鍾應)[1845~1906]이다. 화서연원의 유중교(柳重敎)에게서 수학하였다. 제천 의병에 참가하여 을미사변 때 중군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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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하수경(河秀京)은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진에 투신하였다. 우선봉으로 활약하다가 충주 금가 전투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9년 만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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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진주. 자는 수영(水永). 하한서(河漢瑞)[?~1908]는 단양 출신이다.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 이강년(李康秊)이 다시 의병을 일으킬 때 참가하여 좌선봉이 된 이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갈평 전투와 영월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나, 싸리재 전투에서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제때에 당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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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출신의 문인 김휘두의 문집. 김휘두(金輝斗)[1831~1907]의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자는 공칠(公七), 호는 학음(鶴陰)이다. 학고(鶴皐) 김이만(金履萬)의 6세손이다. 1984년 사종손(四從孫)인 김창진(金昌鎭)이 시문과 관서 기행을 엮어 편집하였다. 『학음선생유집(鶴陰先生遺集)』은 1책의 필사본이다. 내용은 학음선생유집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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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한동직(韓東直)은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오위장을 지낸 전직 관료 출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원주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참여하였다가,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이 친일 관료를 베고 충주성을 장악하면서 기세를 올리자 병력을 이끌고 제천으로 달려와 참진(參陣)하였다. 가흥에 주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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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정치인.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동석(東石). 아버지는 한용호(韓龍鎬)이다. 한필수(韓弼洙)[1900~1986]는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전문학교를 수료하고 만주 룽징[龍井]에 있는 동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1년 만주사변 후 귀국하여 제천으로 낙향하였으며, 한때 예천에서 광산업에 종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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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통 도시였던 제천은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부침하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특히 1980년의 시 승격, 1985년의 충주댐 건설과 그에 따른 수몰 및 인구 이동, 1990년대의 세명대학교, 대원대학 등 대학의 설립, 지방 자치의 발달에 따른 지역 개발과 2005년의 평생 학습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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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백정들의 사회 운동. 형평 운동은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립되어 1935년까지 유지된 형평사를 중심으로 천민으로 박해를 받아오던 백정들이 인권 존중과 평등 대우를 주장한 사회 운동이다. 제천에서의 형평 운동은 1923년 형평사 제천분사가 결성된 이래 처음에는 강한 저항에 부딪쳤으나 빠르게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충청북도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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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 조직. 호좌의진은 단발령 이듬해인 1896년 초에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여 조직된 의병 조직이다.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하던 화서학파 선비와 지평 출신의 포군이 주축이 되었으며 제천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제천 의병이라고도 한다.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고, 제천을 비롯한 충청북도·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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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홍귀봉(洪貴鳳)[?~1896]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의 지도하에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신지수(辛芝秀)가 이끄는 후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 채동집(蔡東集)·임도봉(林道鳳) 등과 함께 충주의 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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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홍대석(洪大錫)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전직 관료 출신으로 제천에 살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다. 1896년(고종 33) 초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였을 때 달천의 유주막을 지키는 파수장으로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공을 세웠다. 제천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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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우용(又容)이고, 호는 하포(下浦). 홍사구(洪思九)[1878~1896]는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하던 유중교(柳重敎)가 별세한 이후에 비로소 장담에 나아갔고, 안승우(安承禹)에게서 주로 배웠다. 1894년(고종 31) 여름 스승인 안승우를 모시고 제천의 백련사에서 글을 읽다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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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옥(元玉·原玉), 호는 성운(醒雲). 홍선표(洪選杓)[1872~?]는 연풍[현 충청북도 괴산군]에 살았으며, 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의 호좌의진에 이조승(李肇承), 이기진(李起振), 정화용 등과 함께 종사로 참여하였다. 영남의 의병을 북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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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의암 고택에 있는 조선 후기 목판. 『화서 선생 아언(華西先生雅言)』은 유교 수양서이다. 조선 후기 주리 철학 3대가 중 한 명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가 말년에 병으로 강학을 할 수 없게 되자,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1819~1891]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1832~1893] 등이 후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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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황기룡(黃基龍)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주도하여 일어난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이 영남의 의병론자들과 제휴하기 위하여 서상렬(徐相烈)을 영남으로 보냈을 때 영남 소토진 선봉장을 맡아 영남 의병과 호좌의진이 제휴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예천에서 영남 일곱 고을의 의진과 호좌의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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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철수(黃哲秀)는 본관이 창원(昌原)이며,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919년 제천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제천 수비대에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였다. 이때 7일간 단식으로 저항하여 제천 수비대에서 의사(義士)라고 일컬으면서 석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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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황학수(黃學秀)[1879~1953]는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부위로 근무하던 중 1907년(순종 1)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귀향하여 동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