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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능과 봉림사의 유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10
한자 -陵-鳳林寺-由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6월 19일 - 「애기능과 봉림사의 유래」 박성석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6월 30일 - 「애기능과 봉림사의 유래」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관련 지명 화성 남양리 신빈 김씨묘역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산 131-17 지도보기
채록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1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신빈 김씨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조선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의 묘역과 관련한 이야기.

[개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산 131-17에 있는 화성 남양리 신빈 김씨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이다. 봉림사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 642에 위치한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애기능과 봉림사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456~458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애기능과 봉림사의 유래」는 1980년 6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1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박성석[남, 73세],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내용]

세종대왕의 후궁 신빈 김씨(愼嬪金氏)[1404~1464]의 묘역이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다. 조선 시대 왕실의 무덤 중 능은 임금이나 임금의 정실 부인인 중전, 즉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는 지칭이다. 이로 보면 후궁인 신빈 김씨의 무덤은 능에 해당되지 않는데, 지역에서는 애기능이라고 불렀다. 지역에서는 신빈 김씨의 후손인 김씨와 이씨가 함께 시향을 모시고 공동제사를 지냈다. 신빈 김씨 묘역 뒤쪽 무봉산 줄기 다른 편 자락에는 봉림사가 자리 한다. 봉림사는 본사 용주사의 말사인데 신빈 김씨의 묘를 위하는 절이라 전해진다.

[모티프 분석]

「애기능과 봉림사의 유래」의 구연자는 세종의 후궁 신빈의 본관을 평산 신씨로 착각하여 구술하였는데, 신빈의 본관은 청풍 김씨이다. 이에 내용 정리에서는 오류를 바로 잡아 기술하였다. 조선 시대 왕실의 무덤은 왕족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능(陵)·원(園)·묘(墓)로 지칭이 구별된다.

능(陵)은 추존왕과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을 생산한 후궁과 같은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이다. 묘(墓)는 왕의 자손이나 후궁,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 등의 무덤이다. 이에 의거하면, 신빈의 무덤은 묘에 해당하는데 지역에서 애기능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신빈 김씨는 본래 내자시(內資寺)의 여종[婢]이었는데,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에게 발탁이 되어 세종이 즉위하던 해 13세의 나이로 중궁전으로 보내졌다. 신빈 김씨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낳았는데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이며 딸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세종이 죽은 뒤 신빈 김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고, 후에 단종이 다시 환속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신빈 김씨의 묘는 봉분 주변으로 곡장(曲墻)[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석상·향로석·장명등이 놓였고, 그 좌우로는 문인석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문인석 중 복두공복(幞頭公服) 형태의 문인석은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묘의 동쪽에는 비각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1465년 건립한 신빈 김씨 신도비는 하엽수방부(荷葉首方趺)[연잎 형태의 비석 머리와 네모난 모양의 비석 받침을 말함] 형태이다. 신도비(神道碑)[임금이나 뛰어난 행적을 남긴 고관의 평생 사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통 무덤 앞 동남쪽에 세움]의 글은 김수온(金守溫)이 짓고, 안혜(安惠)가 글씨와 전서(篆書)를 썼다. 전서로 ‘愼嬪金氏墓碑(신빈김씨묘비)’라고 새겨져 있어서 신빈 김씨의 묘역에 대한 신도비임을 나타낸다.

[참고문헌]
  • 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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