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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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祚 |
영어공식명칭 | Yi Gijo |
이칭/별칭 | 자선(子善),호암(浩菴),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장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양섭 |
출생 시기/일시 | 1595년 - 이기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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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5년 3월 - 이기조 알성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5년 - 이기조 승문원 박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5년 - 이기조 아버지 이현영과 쌍부촌에 은거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8월 1일 - 이기조 사헌부 지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2월 10일 - 이기조 한남도원수 종사관으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 7월 12일 - 이기조 경상도관찰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 11월 5일 - 이기조 호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3월 9일 - 이기조 청나라에 보낼 세폐 감액에 일조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11월 10일 - 이기조 함경도관찰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53년 8월 27일 - 이기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53년 - 이기조 영의정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98년 5월 25일 - 이기조 충간(忠簡) 시호를 받음 |
거주|이주지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
묘소|단소 |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152-11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한산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호조판서|함경도관찰사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및 장안면 일대에 은거한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언을 지낸 이희백(李希伯), 할아버지는 안성군수를 역임한 이대수(李大秀), 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지낸 이현영(李顯英), 어머니 진주 유씨는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유사규(柳思規)의 딸이다. 두 차례 혼인하였는데, 본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손녀와 결혼하였으나, 22세에 사망하였다. 좌부승지 신응구(申應榘)의 딸 고령 신씨와 재혼하였다. 동생으로 이휘조(李徽祚)가 있다.
[활동 사항]
이기조(李基祚)[1595~1653]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밝고 순수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1615년(광해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알성문과에 뽑혔다. 승문원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정홍명(鄭弘溟)을 추천하다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과 이경전(李慶全) 등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에 아버지 이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인 1623년(인조 1) 8월 1일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沈器遠)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당시 경상좌도와 우도의 양전(量田)이 고르지 못한 사실을 조정에 상소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때의 치적으로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인조 14) 안변부사를 지냈으며, 도승지·대사간·이조참의·참판을 역임하였다. 1645년(인조 23) 부제학으로 동지겸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 대에는 국가의 외교 사안 해결에 주력하는 한편, 호조판서가 되어 국가의 재정 정책에 관여하였다. 1650년(효종 1) 8월 진주부사(陳奏副使)에 임명되어 진주사(陳奏使) 이시백((李時白)·서장관 정지화(鄭知和)와 함께 청나라게 가서 조선에서의 성지(城地) 수축과 병기 정비를 금하는 조항을 삭제하여 줄 것을 청나라에 요구하였다. 이에 청나라가 강화조약 위반이라며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을 추궁하자, 오직 이기조만이 적극 변호하여 청나라 사신의 칭찬을 받았다. 1651년(효종 2) 동지사행 때는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가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세폐(歲幣)를 줄여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기조는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의 유통과 관련하여 영의정 김육과 대립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앙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어 함경감사에 제수되었다. 함경감사 재임 중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1653년(효종 4) 김화(金化)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경상도관찰사 재임 기간인 1635년(인조 13) 자신의 선조인 이곡(李穀)의 문집 『가정집(稼亭集)』을 약 300년 만에 재간행하였다. 1943년 오세창이 엮은 서첩인 『근묵(槿墨)』에 이기조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152-11번지에 있다. 묘역은 본래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었으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6번지로 옮겨졌고 이후 개발사업으로 1992년 현재 장소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1698년(숙종 28)에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