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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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婁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윤성재 |
활동 시기/일시 | 1145년 - 최루백 우정언 지제고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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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146년 - 최루백 여름에 우사간, 겨울에 좌사간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147년 - 최루백 봄에 시어사(侍御史), 겨울에 예부 원외랑으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148년 - 최루백 청주부사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153년 - 최루백 기거사인으로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을 하례 |
활동 시기/일시 | 1155년 - 최루백 기거사인으로 왕에게 자문 |
활동 시기/일시 | 1158년 - 최루백 국자사업으로 승보시를 주관 |
몰년 시기/일시 | 1205년 - 최루백 사망 |
묘소|단소 | 최루백 효자각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165-1 |
성격 | 효자|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수주(水州) |
대표 관직 | 기거사인|국자사업|한림학사 |
[정의]
고려 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수주(水州). 아버지는 고려 예종 때 수원 최씨의 시조로 수주(水州)의 호장(戶長)을 지낸 최상저(崔尙翥)이다.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 염경애(廉瓊愛)와 혼인하여 최돈인(崔敦仁), 최돈의(崔敦義), 최돈례(崔敦禮), 최돈지(崔敦智)의 4남과 최귀강(崔貴姜), 최순강(崔順姜)의 2녀를 두었다. 염경애의 사후 재혼하여 다시 3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최루백(崔婁伯)[?~1205]은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산으로 가 호랑이를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져와 깨끗한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安葬)한 다음, 3년 간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어느 날 잠깐 졸았는데, 아버지가 와서 시를 읊기를 “덤불을 헤치고 효자가 있는 여막에 도착하니 애틋한 정에 마음속 깊이 감격하여 흐르는 눈물 끝이 없네. 흙을 짊어지고 매일 무덤 위에 흙을 더하니 알아주는 이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로다.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무덤을 지키니 효도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고 누가 말하였는가.”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1145년(인종 23)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옮겼으며, 1146년(의종 1) 우사간(右司諫)과 좌사간(左司諫)을 맡았다. 1147년(의종 1)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가, 1148년(의종 2) 봄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옮겼고, 곧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 1153년(의종 7)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 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 자문에 응하였다. 1158년(의종 12)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있으면서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諒)과 함께 승보시(升補試)를 맡아, 윤돈서(尹敦敍) 등 16명을 급제시켰다. 벼슬이 한림학사 국자좨주(翰林學士國子祭酒)에 이르렀다. 1205년(희종 1)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루백이 지은 첫 부인 염경애의 묘지명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최루백의 효행은 널리 알려져 『고려사』 효우(孝友) 열전과 조선 시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 수록되었다. 정몽주는 최루백을 가리켜 ‘동방의 유종(儒宗)’이라 칭송하였으며,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을 싣게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숙종은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며 정려비(旌閭碑)를 세우게 하였다. 정조는 융릉 남쪽에 있던 최루백의 비각을 서남쪽 홍법산 기슭으로 옮겼으며, 최루백이 태어난 마을을 효자동, 호랑이를 잡은 뒷산의 큰 바위를 효암(孝巖)이라 이름 짓고 최루백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하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