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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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豐壤 趙氏 |
이칭/별칭 | 들목 조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한상우 |
본관 | 풍양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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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들목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
세거|집성지 | 풍양 조씨 집성지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매송면 원리|팔탄면 구장리 |
성씨 시조 | 조맹 |
입향 시조 | 조계팽 |
[정의]
조맹을 시조로 하고 조계팽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화성시의 세거 성씨.
[연원]
풍양 조씨 시조는 조맹(趙孟)으로,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도운 공으로 문하시중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조맹 이후 한동안 구체적인 가계 정보가 전하지 않는다. 화성 지역 풍양 조씨는 고려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조신혁(趙臣赫)을 중시조로 삼는 평장사공파에 속한다.
화성 지역 풍양 조씨는 조선 후기에 많은 관료와 무장을 배출하였다. 특히 효종 대에 영의정에 오른 조익(趙翼)[1579~1655], 현종 대에 예조 판서를 지낸 조복양(趙趙趙)[1609~1671], 숙종 대에 대사성과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낸 조지겸(趙持謙)[1639~1685] 삼대가 유명하다. 삼대 모두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에 있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1661년(현종 2) 배향되었다.
이후 풍양 조씨가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조지겸의 5대손 조만원(趙萬元)[1762~1822]이 신도시 수원을 조성하던 정조의 눈에 띄면서부터이다. 조만원은 순조 대에 형조 판서, 지경연사에 올랐고, 조만원의 아들 조학년(趙鶴年)[1786~1854]도 헌종 대 이조 판서를 거쳐 철종 대에 우참찬에 올랐다. 이때부터 화성 지역의 풍양 조씨들을 특별히 ‘들목 조씨’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들목은 매송면 야목리의 지명이다.
[입향 경위]
풍양 조씨 화성 지역 입향조는 조선 초 수원도호부사와 남양도호부사를 역임한 조계팽(趙季砰)이다. 『풍양조씨세보』에는 조계팽의 묘가 남양부 소교촌 수작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이다. 처가인 여주 이씨의 배경을 좇아 화성 지역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계팽의 둘째 아들 조지진(趙之縝)은 지금의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의 구포(鷗浦)와 병곡에 기반을 조성하였다. 조지진의 둘째 아들 조현범(趙賢範)[?~1538]은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우수사를 지냈으며, 조현범의 아들 조안국(趙安國)[1501~1573]도 경상우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안국의 후손을 중심으로 송라리 일대의 구포, 야목, 송라, 원리 등지에 세거하였으며, 선영은 당시 광주 북방면 직동[옛 화성군 반월면 지역으로,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건건동에 해당]에 마련하였다.
[현황]
풍양 조씨는 198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화성 지역에 모두 175세대 736명이 거주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2015년 조사에서는 1,730명이 확인되었다. 매송면 야목리의 들목과 당곡, 매송면 원리, 봉담읍 유리, 팔탄면 구장리 등에서 풍양 조씨 마을이 확인된다.
[관련 유적]
풍양 조씨 관련 유적으로는 조익, 조복양, 조지겸 삼대를 배향한 명고서원이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명고서원은 1668년(현종 9)에 사액까지 받았으나, 현재는 주춧돌만 몇 개 남은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