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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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珠寺 大雄殿 後佛幀畵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희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2년 5월 4일 -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 경기도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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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화성 용주사 삼장보살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현 소장처 | 용주사 대웅보전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
성격 | 불화 |
소유자 | 용주사 |
관리자 | 용주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용주사 대웅보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불화.
[개설]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의 대웅보전에 봉안된 후불탱화이다. 후불탱화는 중앙에 석가불, 좌우에 약사불,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주변에 여러 보살과 불제자 및 천부중(天部衆)을 그려 넣는 형식의 불화이다. 현세의 무병장수와 함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삼불 개념의 도상은 여말선초부터 나타났지만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행했는데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제작되었다.
용주사는 1790년 현륭원 재궁으로 창건되었다. 현재 용주사에 보관된 대부분의 문화재는 창건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제작자와 제작시기를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창건 당시인 1790년설 또는 19세기설, 20세기설이 있다.
[형태 및 구성]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향우측에 동방의 약사불, 향좌측에 서방의 아미타불을 삼존으로 배치했다. 석가모니불은 수인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다른 여래보다 더 크게 그리고 광배도 주형(舟形)으로 그려넣었다. 약사불은 왼손은 무릎위에 놓아 약기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으로 올려 수인을 취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구품인을 결하고 결과부좌 하였다.
삼세불 주위에는 다양한 제자와 권속들이 설법을 듣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삼세불 앞에는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시립하고, 그 하단에는 지혜와 실천을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향우측]과 보현보살(普賢菩薩)[향좌측]이 시립했다. 그리고 문수, 보현보살 옆 하단 모서리에는 향우측의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향좌측의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이 있으며, 상단끝의 모서리에는 향우측에는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이, 향좌측에는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이 호위하고 있다. 향우측의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있으며, 향좌측의 아미타불 아래에는 권속인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菩薩)이 시립했다. 또한 약사불과 아미타불 옆 가장자리에 좌우로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있으며, 그 위에 좌우로 범천(梵天)과 제석전(帝釋天), 삼세불 뒤쪽 공간에는 2구의 타방불(他方佛)과 불제자, 용왕(龍王), 용녀(龍女), 선동(仙童)등이 시립했다.
[특징]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불화에서는 보기 힘든 입체적인 구도와 명암 표현, 삼세불의 사실적인 인물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18세기 전반 후불탱화는 종교적인 위계(位階)에 따른 관념적 대소(大小)와 근하원상(近下遠上)의 원근표현에 따라 존상들을 배치해 평면적인 공간배치였다. 하지만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투시법과 원근법이 반영되어 공간배치를 입체적으로 하였는데, 수미단 앞의 공간을 이전의 후불탱화보다 2배 가까이 확대해 넓은 입체적 공간을 설정한 뒤, 넓은 공간을 부감할수 있도록 시점을 높게하고, 그 안 3~4열에 보살과 사천왕, 아난, 가섭 등의 인물을 입체적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면(面) 중심의 음영식 명암법이 사용되었다. 인물 표현에서는 빛을 많이 받아 밝은 곳은 밝게 칠하고, 어두운 곳은 어둡게 칠하되 미세한 층차를 주는 선염법(渲染法)으로 명암표현하여 사실성을 높였다. 의복 표현에서도 옷 주름 양 옆의 오목한 부분은 어둡게 칠하고, 도드라진 부분은 흰색을 섞어 밝게 칠한 후, 가장 밝은 곳은 흰색 하이라이트를 강하게 농채(濃彩)를 하는 방법으로 입체감을 강조하였다.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의 독특한 화법은 서양화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법을 통해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에서는 기존에 부처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현실적이고 실체적인 부처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화기가 없고 제작자에 대해서도 각 기록마다 상이하여,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성록(日省錄)」과 「수원부지령등록(水原府指令謄錄)」은 김홍도가 감동(監董)하였고 도화서 화원인 김득신, 이명기와 화승 상겸, 민관 등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황덕순의 「닫집원문」에서는 황덕순과 용동국, 소차지 등에게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는 일을 감독케 하고 민관, 상겸, 성윤 등 25인의 화승이 불화를 조성하였다고 되어있으며, 「용주사적기」에는 「삼세불회도」는 화원 김홍도, 「삼장보살도」는 민관, 「감로도」는 상겸이 그렸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제작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많다. 불화 연구자들은 현재 남아있는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18세기 후반 불화에서는 불가능한 양식이기 때문에 1790년대 원본으로 보지 않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1790년에 그려진 원본으로 보는 견해에도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에서 보이는 서양화법은 20세기 초 개채된 결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가 1790년 당대에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제작시기와 제작자에 대한 기록이 각각 다른 이유는 기록의 성격이 다르고, 기록의 성격에 따라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내용 중심으로 취사선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화에 당대 쉽게 볼 수 없는 서양화법이 반영된 것 역시 19세기, 20세기 이후에 개채된 결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용주사에 절대적으로 후원하였던 정조의 영향으로 궁중화원들은 새로운 화법을 수용하여 더욱 진보된 불화를 제작하려 시도하였고, 삼세불화도는 여러 능력있는 화승들과의 합작 끝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세불회도는 원근법과 명암법 등 당시 최신의 방법이 적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뛰어난 미감(美感)과 화격(畫格)을 갖추게 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제작자와 제작시기에 대한 논란이 계속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화에서 새로운 화법이 어떻게 구현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임에 분명하다. 또한 용주사 창건이 정조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 불사인만큼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는 용주사와 왕실의 관계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