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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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磬石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특산물/특산물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지은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남양도호부에서 생산된 옥돌.
[개설]
남양 경석(磬石)은 조선 시대 나라의 제의에서 사용되는 악기인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제작할 때 사용되던 옥돌이다. 편경과 특경은 옥돌을 재료로 하는 타악기로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등에 사용된다. 특히 편경의 경우, 재료가 돌이라는 특성상 습기나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음색과 음정이 일정하여 모든 국악기 조율 시 표준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악기를 만들 만큼 질 좋은 경석이 생산되지 않아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사용하다가 조선 시대 남양도호부에서 발견된 이후부터 남양 경석이 악기 제작에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기 남양도호부에는 “경석이 부 동쪽 사나사(舍那寺)의 서쪽 산에서 난다. 빛이 푸르고 흰 것이 섞이고 문채가 있다. 금상(今上) 9년 정미에 캐서 경쇠를 만들었는데, 소리가 음률에 맞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425년(세종 7) 경기도 남양도호부에서 생산된 경석은 안산암(安山岩)의 일종으로 옥돌이라고도 한다.
이후 박연(朴堧)이 경석을 이용해 1426년부터 1428년까지 종묘·영녕전 등의 제례의식에서 사용된 편경과 특경을 합해 모두 528매를 제작하였다. 사실 남양 외에도 경석을 생산하는 지역들이 평안도 성천(成川), 함경도 단천(端川) 등 많았으나 남양 경석의 질이 가장 우수하여 국가 제의에 필요한 편경은 남양 경석으로만 제작되었다.
특히 『광해군일기』[정초본] 권54에 “남양의 옥석으로 옥보와 옥책을 만들자.”라는 구절이 있어서 국새를 만들 정도로 질 좋은 경석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남양 경석을 채취하여 편경을 제작하였고 이를 통해 아악의 전통이 계속 전승되고 있다.
[제조(생산) 방법 및 특징]
조선 시대 영조 대에 편찬된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仁政殿樂器造成廳儀軌)』에 따르면, 편경을 제작하는 단계는 옥석을 캐는 채옥, 이를 운반하는 수송, 이후 옥석의 가공과 편경을 제작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채옥은 남양도호부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로, 경기감영(京畿監營) 하에 있는 남양도호부와 인천도호부가 함께 참여했다.
경석의 수송은 수송을 담당한 차사원(差使員)이 남양에서 출발하여 안산과 현재 경기도 시흥에 해당하는 금천(衿川)을 거쳐 한성(漢城)으로 운반하였다. 이렇게 재료를 모아서 마지막으로 편경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편경을 만드는 장인(匠人)과 필요한 행정처리를 담당하는 관리가 제작에 참여했다.
[현황(관련 사업 포함)]
국립국악원은 2008년 남양 경석을 소유한 한국궁중옥연구원의 제안으로 세종조 편경 복원 제작사업을 계획하였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복원재현사업 추진의 일환으로 2009년 9월 국립국악원은 경기도 화성시 건달산에서 경석을 채취하여 조선 시대 편경을 복원하였다. 복원된 편경은 같은 해 11월 고악기 연주회를 통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