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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446
한자 鄭胤永
영어공식명칭 Jeong Yoonyeong
이칭/별칭 군조(君祚),석화(石華),후산(后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3년 12월 15일연표보기 - 정윤영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98년연표보기 - 정윤영 사망
출생지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금곡리
유배|이배지 함경남도 이원군
성격 유학자
성별 남성
본관 초계(草溪)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조선 후기 유학자.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 아버지는 정현풍(鄭鉉豊)이고, 어머니는 강시면(姜時冕)의 딸 진주 강씨이다. 큰아버지 정현택(鄭鉉澤)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부인은 남종정(南鍾正)의 딸 의령 남씨이다.

[활동 사항]

정윤영(鄭胤永)[1833~1898]은 1833년 12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수원유수가 개설한 화성군 백일장에 응시하여 1등을 하였다. 1869년 37세의 나이로 공주 명강산의 임헌회(任憲晦)의 문하로 나아갔다. ‘석화(石華)’라는 호는 임헌회가 이이의 호인 석담(石潭)과 송시열의 호인 화양동주(華陽洞主)에서 착안하여 내려준 것이다. 임헌회가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그 연장선으로 문하의 정윤영에게도 ‘석화’라는 호를 지어준 것이다. 임헌회의 문인이었던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고, 이항로학파(李恒老學派)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과도 교유하며 사상과 활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을 주기(主氣)의 처지에서 피력하였다. 1871년 봄, 안성군 후산(后山)으로 이사하였고, 과거를 포기한 뒤 부모를 봉양하는 일과 독서에 전념하며 지내었다. 1875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후산에 장사지내고, ‘후산’을 호로 사용하였다. 1876년 1월, 일본의 강화도 침범에 스승 임헌회에게 편지를 보내 척화(斥和)를 건의하였다.

1881년(고종 18)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경기도에서는 같은 해 4월에 유기영(柳冀永)을 대표로, 6월에는 신섭(申㰔)을 대표로 두 차례 상소문이 올라갔다. 이때 상소문을 작성하는데 정윤영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소문은 「후산집」권5에 수록되어 있다. 정윤영은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를 작성하여 경기 유생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결국 신섭이 금갑도로 유배를 갔고, 8월 21일 정윤영 또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함경도 이원현(利原縣)에 정배되었다. 1882년(고종 19) 6월 12일, 정윤영을 즉시 풀어주라는 왕명이 내려졌지만, 1883년 1월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았다. 그 해 7월 22일 의금부도사, 같은 해 8월 17일 성균관직강, 이듬해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모든 관직을 사양하였다.

[학문과 저술]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을 때, "처의(處義)에 있어 신하들은 마땅히 나가서 죽어야 하고 선비들은 자정(自靖)해야 한다."라고 역설하였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명(自靖銘)」을 지었다.

저서로 『후산집(后山集)』·『위방집략(爲邦輯略)』·『화동연표(華東年表)』 등이 있다.

그의 문집인 『후산집』 권1과 권2에는 1881년 9월 초에 유배 길에 올랐을 때부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1883년 봄까지의 작품이 순차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오언절구 33수, 오언율시 10수, 칠언절구 29수, 칠언율시 27수, 오언고시 1수, 칠언고시 3수로 총 86제(題) 103수이다. 부(賦) 4편, 사(詞) 3편을 더하면 유배 시기에 지은 시는 총 93제 115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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