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1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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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昌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철웅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4월 5일 - 황창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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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7일 - 황창오 황해도 해주군 동운면 삼정리 독립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 황창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7월 - 황창오 대동단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황창오 해주군·연백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중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7월 - 황창오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83년 4월 21일 - 황창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황창오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
출생지 | 황해도 해주군 동운면 삼정리 |
학교|수학지 | 의창학교 - 황해도 해주군 |
묘소 | 황창오 묘소 - 화성시 배양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기념비가 있는 독립운동가.
[가계]
부친은 황윤조이며 자작 및 소작농이었다.
[활동 사항]
황창오(黃昌五)[1896~1983]는 황해도 해주군 동운면 삼정리에서 태어났다. 1908년 해주의 기독교 학교인 의창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해주 지역에서도 이에 동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기독교 목사 오현경이 교인들과 1919년 3월 9일 남욱정(南旭町)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3월 10일 웅진군 천도교인 수백 명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써진 깃발을 들고 해주읍내로 진입하며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창오는 4월 7일 7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동운면 삼정리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 되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황창오는 황해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1920년 5월부터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7월에는 대동단 총재 김가진으로부터 대동단 가입 증서와 군자금 모집 특파원 임명장을 받았다. 해주군과 연백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황창오는 1921년 밀고를 당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7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징역 1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황정오는 1927년 11월 가석방 되어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6·25전쟁 중, 1·4 후퇴 때 월남하여 피난촌이 형성되었던 경기도 화성시 배양동에 정착하였다. 1970년 기독교 대한감리회 배양교회 권사로 일하다가 1983년 4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현충원에 묘소가 있고 경기도 화성시 배양동에 기념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황해도 해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고, 대동단 활동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6년 이상 옥고를 치른 공적이 확인되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