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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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영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0년 6월 19일 - 「홍당각시 이야기」 박성석으로부터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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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6월 20일 - 「형도의 탑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
관련 지명 | 홍법사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 1-2 |
채록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1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홍랑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에 있는 홍법사의 창건 유래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개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 1-2에 위치한 홍법사(弘法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남양 홍씨 집안의 규수였던 홍랑의 넋을 기리기 위해 홍씨 문중이 세운 절이라고 전해진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2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홍당각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458~459쪽에 수록되어 있다. 「홍당각시 이야기」는 1980년 6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1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박성석[남, 73세],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이 외 자료로 1984년 발간한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의 217~223쪽에 실린 「홍법리의 돌배[石舟]와 무쇠사공」, 1990년 출판한 『화성군사』하권의 896~898쪽에 수록된 「돌배[石舟]와 무쇠 사공」, 1998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출간한 『경기도민속지: 구비전승』의 812~813쪽에 수록된 「정절을 지킨 홍낭자」가 있으며, 2013년 화성문화원에서 간행된 『경기도 화성시 구비전승 및 민속자료 조사집』11-서신면 편의 60쪽과 78~80쪽에도 「홍법사 유래담」이 실려 있다. 홍법사 입구에 세워진 게시판을 통해서도 「홍법사 창건유래」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용]
옛날 남양반도의 해변마을인 서신의 홍법리 마을로중국 천자의 후궁을 구하러 사신들이 들어왔다. 사신들은 젊은 아낙네들을 모조리 끌어내며 행포를 부렸다. 마을 어른인 홍초시를 비롯한 주민들은 아낙네들을 숨겨보았지만, 이미 온 마을은 비명과 통곡의 아수라장이었다. 마을의 남양 홍씨 홍만석의 딸 홍랑은 절색이라고 널리 소문난 터였다. 이를 안 관원들은 홍랑을 내놓지 않으면 왕명을 어긴 죄로 삼족을 멸하고 마을까지 폐촌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마을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던 홍랑은 조공의 제물로 희생하리라 결심하였다. 대신 고향의 모래와 대추, 물을 서 말씩 가져 갈 것을 간청하였고, 이를 가지고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명나라로 간 홍랑은 천자의 후궁이 되었다. 그럼에도 홍랑은 고향에서 가져간 대추와 물만 먹으며 연명을 하였고, 가지고 간 모래를 궁 뜰에 뿌리며 그 위로만 걸어 다녔다. 이렇게 백일동안 단식투쟁을 하며 몸을 지키던 홍랑은 결국 죽게 되었다. 홍랑은 세상을 떠나기 전, “내 목숨이 없어지더라도 내 넋은 보살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며, 내가 뿌린 모래는 궁 뜰에 남아서 천자가 회개하도록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중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홍랑이 죽은 지 3일 만에 천자는 이름 모를 병을 얻었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 날 천자의 꿈에 홍랑이 나타나 말했다. “방탕한 성품을 참회하고 백성을 아끼는 성군이 되옵소서. 그리고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돌로 만들고, 돌배에 태워서 무쇠사공 12점과 함께 고향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폐하의 병도 나을 것이며 나라도 부흥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꿈에서 깬 천자는 석공과 철공을 시켜 돌로 보살상과 배를 만들고, 사공 12점은 철로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도 불전에 나아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홍랑의 넋을 위로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다.
백일기도의 마지막 날, 천자는 완공이 된 돌로 만든 보살상과 무쇠로 만든 12점의 사공을 돌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돌배는 돌보살상과 무쇠사공을 싣고 서해를 건너와 서신 홍복 개포리 앞바다에 다다랐다. 이 날 홍법리 남양 홍씨 문중의 세 원로가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홍랑이 나타나 “서신 앞바다에 도착한 돌보살상과 무쇠사공이 있으니 이를 받들어 사찰을 짓고 모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꿈을 꾼 노인들이 같이 서신 앞바다에 나가 보니 정말 돌배가 와서 닿아있고, 돌배 위에는 돌보살상과 무쇠사공이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조심스럽게 돌배 위의 보살상과 무쇠사공 2기를 내리자, 나머지 무쇠사공 10기와 돌배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양 홍씨 문중은 서신 앞바다가 굽어보이는 마을 뒷산에 홍법사를 세워 홍랑보살과 무쇠사공 2기를 봉안하고 홍랑의 넋을 기렸다.
[모티프 분석]
절의 창건 유래와 관련한 이야기 유형을 사찰연기설화나 사원연기설화라 일컫고, 줄여서 창건설화나 창사설화라고도 한다. 사찰연기설화는 보통 절터를 잡게 된 내력이나 절이름을 짓게 된 내력이 설명되면서, 불교적 성격을 띠는 기이한 영험담이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그 기이함은 대개 불교의 대표적이고 유명한 부처·보살·고승과 관련하는 것이 많다. 이와 비교해보면 홍법사의 창건설화인 「홍당각시 이야기」는 일반적인 보통 사람인 홍랑의 생애와 죽음이 주된 내용이고 그 넋이 보살로 연계된다는 점에, 정통적 불보살(佛菩薩)이나 고승의 이적이 등장하는 여타의 사찰연기설화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또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 3점을 홍랑의 넋이 담긴 보살상과 그녀를 고향으로 인도한 무쇠사공 2기라고 믿는 전승집단의 믿음도 자못 특이하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다양한 구술자료를 참고하면, 먼저 인물이 다양하게 지칭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남양 홍씨 집안의 규수로 나오는 홍씨 처녀는 홍랑, 홍낭자, 홍랑보살, 홍당각시, 아기부처, 돌부처 등으로 불린다. 또 자료에 따라 당나라, 명나라, 왜나라 등으로 잡혀가는 국가와 시기가 다양하다.중국 천자의 접촉을 끝까지 거부하고 고국의 땅과 과실, 물만 먹으며 버티다 결국 죽고 마는 과정이 나타나는 자료는 비교적 서술이 자세한 편이다.중국이나 일본으로 잡혀갔다 바닷물에 빠졌는데 발견하여 건졌더니 이미 죽어있었다거나, 돌부처로 변한 것을 건졌다고 간단히 처리하는 자료도 있고, 이국으로 잡혀가는 화소보다 영험이 더 강조되는 각 편도 있다.
한편 홍랑 설화에서 대체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바다에서 돌부처 신체(神體)를 건져내어 신으로 모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돌부처에는 여성이라는 성별이 부여되고, 자료에 따라서는 홍랑이 죽어 돌부처로 변했다고 여기고 있다. 바다를 통해 마을로 돌부처가 들어오는 과정은 조금씩 다른데, 만들어진 사공과 함께 배를 탄 채로 표착하자 현몽을 통해 계시를 주어 발견한 마을주민이 들어 내린 것, 물에 떠내려가던 돌부처를 주민이 건진 것, 조업을 하던 어부의 그물에 돌부처가 걸린 것 등이다. 이와 같이 바다를 통해 건져 올린 돌부처 또는 돌미륵을 당신으로 모시는 사례는 도서해안 지역의 마을에서 주로 발견된다. 홍랑이 모셔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 또한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매립되기 전에는 바다를 접한 포구 마을이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돌부처가 타국으로 잡혀간 홍씨 처녀의 현몽담과 결부되어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 신앙에 홍당각시 보살이라는 불교적 성격이 더해진 마을신앙으로 신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홍법사에 모셔진 이후로도 절 앞에서는 말을 타고 지나가면 발굽이 땅에 붙어 지나갈 수 없어,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는 새로운 영험담이 파생되어 전승되었다. 홍랑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남양 홍씨 일가 및 홍법리 주민들의 수도 적지 않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홍당각시가 지역 내 신앙집단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