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1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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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松山面 名稱-由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영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0년 6월 20일 - 「삼족리 이야기」 김찬모로부터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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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9월 30일 - 「삼족리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
관련 지명 | 솔뫼포구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중송리 |
채록지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
성격 | 설화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담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의 지명 유래와 관련한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1981년 9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송산면(松山面) 명칭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505~506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1980년 6월 20일 송산면 사강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김찬모[남, 64세],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내용]
송산면 지명의 유래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중송리에 있던 솔뫼포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말인 솔뫼를 한자로 옮기면 송산(松山)이다. 민간에서는 솔뫼포구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옮겨 표기하여 송산포구라 하였다. 송산포는 옛날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제일 먼저 가격한 자리라고 전한다. 그런데 간척 사업이 진행 되면서 송산포 지역이 육지화가 되어, 옛 솔뫼포구와 관련된 유적은 모두 사라졌다. 간척된 토지는 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티프 분석]
송산면 지명 유래 구전 내용 중 특이한 점은 백제를 침공하려고 들어온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군대가 가장 먼저 가격한 곳이 솔뫼포구 일대라고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당연합군의 침공 당시 당항성 일대는 이미 신라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당나라 군대는 동맹관계인 신라의 영토에 속하는 당항성 일대를 공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전쟁 상대국에 대한 침공이 아닌 당나라 군사들의 식량 충족을 위한 침범 행위가 일어났을 지라도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가리기 어렵다. 역사 기록에 나당연합군 전쟁의 모든 전투 침략 행위가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당항성 일대의 소속 국가의 변천을 살펴보면 먼저 마한의 소국에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침공했을 때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한 백제에 잠시 속했다가 동맹을 깬 진흥왕의 공격으로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백제는 당나라로 통하는 신라의 바닷길을 끊고자 당항성 탈환에 여러 번 시도하나 신라는 끝끝내 당항성을 지켜냈다. 이로 보면 당항성 일대의 침공은 고구려 장수왕과 백제 성왕, 그리고 신라 진흥왕에 의해 일어났다. 이렇듯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첫 가격 장소라는 구연은 실제 역사적 흐름과 맞지 않다. 그러나 백제 침공을 위해 덕물도로 온 12만의 당나라 군대를 맞이하러 태종무열왕이 아들 법민[문무왕]을 보냈고, 법민은 신라의 당항성에 주둔하던 군선을 이끌고 덕물도로 가 소정방과 작전 회담을 하고 돌아온다. 이렇듯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사건과 당항성 지역은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요한 군사 거점 기지로 사용되었다. 이에 신라 군대 주둔지이자 바닷길로 이동한 당나라 군대에게 접근성이 좋은 송산면 일대는 다양한 사건의 변수가 존재할 수 있다. 이에 향후 지역사 연구를 위한 보조적 자료로 참고할 수 있음에 의의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