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1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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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說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영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0년 6월 9일 - 「만경원과 낭섬 전설」 김선진으로부터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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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9월 30일 - 「만경원과 낭섬 전설」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
채록지 |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조암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이만경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담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조암리에서 전승되는 만경원과 낭섬에 관한 지명유래담.
[개설]
「만경원과 낭섬 전설」은 만경원이라는 바닷물을 막는 둑과 낭섬에 있는 명당에 관한 유래가 전해지는 지명유래담·풍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9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만경원과 낭섬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360~366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만경원과 낭섬 전설」은 1980년 6월 9일 조암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김선진[남, 43세]으로 당시 우정면 설화 조사의 주 제보자이다. 조사자로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 참여하였다.
『경기도 화성시 구비전승 및 민속자료 조사집』2-우정읍 277쪽과 352~353쪽에도 만경원에 관한 전설이 채록되어 있다.
[내용]
호곡리에 살던 이만경이라는 사람이 몇 달 동안 바닷가를 측량하고 나서 바닷물을 막아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만경은 벌목을 하여 바다에 나무를 꽂아놓고 우죽으로 막았다. 주민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속는 셈치고 도왔다. 그러던 중 마을의 큰 부자가 죽어 그 아들이 좋은 묘자리를 구하고자 애썼지만 오래되도록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노승이 나타나 가까운 곳에 명당을 두고도 찾질 못한다고 하였고 아들은 아버지의 묘자리를 부탁한다. 노승은 만경원으로 육지와 연결된 낭섬에 가서 물을 보고 들어가는 바위아제[바위게] 형국의 좋은 명당이 있기는 하나 시키는 대로 묘를 쓰지 않으면 재앙이 따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들이 방법을 물어보자 노승은 시신을 땅에 그대로 놓고 매일 한 줌의 흙을 덮어 묘를 쓰면 후손이 번영할 것이고, 땅을 잘못 건드리면 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우가 아버지 시신에 해코지를 할까봐 걱정이 된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묻기로 하고 땅을 팠다. 땅을 마지막으로 팔 때에 큰 바위아제가 찍혀 피를 흘리고 나왔는데 그냥 걷어내고 아버지를 모셨다. 이 날 이만경은 둑이 바닷물을 막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고사를 하고 왔는데 자정이 되니 벼락이 치고 폭풍이 몰아쳤다. 날이 밝을 때 나가보니 벼락이 낭섬을 때려 혈이 끊어졌고 이로 인해 파도에 쓸려나온 흙모래가 전에 만들어 놓은 둑으로 모여 쌓였다. 이로써 큰 둑이 된 만경원이 바닷물을 막아 큰 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혈이 끊긴 낭섬은 다시 섬이 되어버렸고, 낭섬에 묘를 쓴 집은 망하였다. 이만경은 만경원으로 생긴 대지를 주민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일제 강점기 때 3·1독립운동을 한 이후 일제가 학살을 자행하여 화수리나 호곡리 쪽의 주민들이 낭섬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부지했다.
[모티프 분석]
「만경원과 낭섬 전설」은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만경에 의해 만경원이라는 둑이 만들어지고 이로 인해 만경원뜰이라는 넓은 들이 생겼다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부잣집 아들이 금기 위반을 하여 낭섬에 있던 부친의 산소 명당이 파손되었다는 부분이다. 전자는 지명유래담으로 하늘이 낸 이인으로 인해 바다에서 육지로 자연 지형의 변이가 생기는 모티프를 가진다. 후자는 풍수담으로 금기를 위반하고 명당을 파손하여 집안이 망하게 되는 파명당(破名堂) 모티프를 가진다. 전·후자 모두 자연의 힘이 작용하여 둑을 만들어 바닷물을 막고자 한 이만경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금기를 위반하여 명당을 파손한 부잣집 아들의 집안이 망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연의 거대한 힘을 신이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설화적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