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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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 監理 敎會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시장로 43[남양리 557-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은선 |
설립 시기/일시 | 1894년 8월 15일 - 남양교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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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남양교회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586 |
현 소재지 | 남양교회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시장로 43[남양리 557-1] |
전화 | 031-356-1497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
[설립 목적]
남양감리교회는 인천내리교회의 존스 선교사와 복정채 권사가 남양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1894년 8월 15일을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1897년 4월 7일을 창립일로 인정하다가 2016년부터 1894년 8월 15일로 창립일을 변경하였다.
[변천]
남양감리교회는 1899년이 되어 홍승하와 김홍수 등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다. 『신학월보』에 따르면 남양감리교회는 1899년 존스 선교사가 제물포에서 파송한 복정채가 주로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존스 선교사가 순회 지도하였다. 교인으로는 남양 사람으로 서울에서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받아 신앙 생활을 하던 홍승하의 가족과 홍사두와 부인 안 엘리사벳 가족, 한가울에 거주하는 전 죽산군수 김홍수 가족 외 한 가족, 활화문 김치도 가족 외 두 가족, 글판리 김병권의 가족과 이씨 가족 외 한 가족이 있었다. 낮 예배는 남양읍 홍승하의 집에서, 밤에는 글판리 김병권의 집과 이씨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남양감리교회는 남양 지역 근대 교육의 요람인 보흥학교를 1901년에 설립하였고 1902년에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제하여학교를 세웠다. 남양감리교회는 남양 지역의 모교회로서 남양감리교회 목회자가 남양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목회를 하였고 1905년에는 세워진 교회들에 순회하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2년이 되면 남양 지역의 21개 교회를 동지방 10개 서지방 11개로 구분하였다. 남양감리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1934년 3월부터 1942년 2월까지 8년간 진행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의 목회를 바탕으로 교회와 함께 남양 구역을 부흥시켰다. 이필주 목사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민족적 지조를 지키시면서 교회를 지켰으며 지금도 남양감리교회 안에는 이필주 목사를 기리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1946년에 33인의 민족대표였던 오화영 목사가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3·1운동 50주년을 기념하는 1969년에 허숙일 목사가 양노리 묘지에 있던 이필주 기념비를 옮겨 세운 것이다. 남양감리교회는 1954년부터 총리원측과 호헌측이 분열하며 많은 아픔을 겪었으나 1958년 교회가 통합되었다. 1960년 교회에서 이탈했던 성도들이 돌아와 1961년 현재의 자리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79년에는 예배당을 40평에서 60평으로 증축하였다. 1982년 2월 25일 폭설로 교회가 무너져서 1983년에 현재의 건물로 재건하였다. 2019년 교회 주변에 1,800여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200평의 교육관을 건축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남양감리교회는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하여 외국인 노동자 쉼터, 노인대학을 운영하며 작은 도서관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필리핀을 비롯한 해외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현황]
남양감리교회는 목사 1명, 전도사 1명 등이 사역하고 있다. 교육부서로 유치부, 초등부, 아동부,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있으며 장학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학교 졸업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대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지원하여 후세대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양감리교회는 남양 지역의 모교회로서 남양 지역 교회들에 순회 목회를 하여 성장시켰으며, 남양감리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보흥학교와 제하여학교는 남양 지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남양감리교회에는 이필주 목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매년 3·1운동 기념 행사를 통해 독립 정신을 계승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