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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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敬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린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11월 1일 - 조경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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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5일 - 조경칠 향남면 발안리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15일 - 조경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조경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4월 15일 - 제암리사건 |
출생지 |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사건으로 순국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경칠(趙敬七)[1873~1919]은 1873년 11월 1일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3번지이다. 조경칠은 1919년 3월 25일 향남면 발안리에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에는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시위를 해산시킨 보병부대는 4월 15일 발안 시장에서 2㎞ 정도 떨어진 인근 제암리로 이동하여 주민을 참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기독교 예배당과 천도교 교회당을 포함한 가옥 28채가 불탔다. 일본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 이하 보병 11명은 경찰관과 협력하여 군중을 해산하였고, 조경칠을 포함한 20여 명의 주민들을 교회당에 소집시켰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훈계를 하고 난 후 교회당을 나갔고, 교회당 입구와 창문을 모두 봉쇄한 후 부하들에게 총을 발사하고 방화하도록 명령하였다. 조경칠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 전동례(田同禮)와 김순이(金順伊)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발안 장터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제암리사건으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