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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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夏永 |
영어공식명칭 | Woo Hayoung |
이칭/별칭 | 대유(大猷),취석실(醉石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완 |
출생 시기/일시 | 1741년 - 우하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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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96년 - 우하영 시무책(時務策) 상소 |
활동 시기/일시 | 1804년 - 우하영 『천일록(千一錄)』을 올림 |
몰년 시기/일시 | 1812년 - 우하영 사망 |
묘소|단소 | 추연우성전묘역(우하영묘역포함)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 78-1번지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단양(丹陽)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부친은 우정서(禹鼎瑞)이며, 백부 우정태(禹鼎台)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우하영(禹夏永)[1741~1812]은 1741년에 태어났다. 1755년(영조 31)부터 과거공부를 시작하여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만연한 과거 시험의 부정 등으로 인하여 회시(會試)에서만 12번 낙방하였다. 이에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화성 지역에서 유생으로 평생을 보내며 권농 정책을 정리한 농촌 지식인이었다. 1796년(정조 20) 우하영은 조정의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려오자, 시무13조(時務十三條)를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올렸다. 1804년(순조 4)의 구언에 이전의 글을 다시 보완하여, 『천일록(千一錄)』이라는 제명으로 조정에 상정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였다.
[학문과 저술]
우하영은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고 사회 실정을 체험하였으며, 옛 문헌과 당대 여러 논설을 널리 읽고 수집하여 국가·사회의 경영 및 개혁 방안을 종합한 『천일록(千一錄)』 11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전제(田制)·군제·국방·관제·농업 기술 문제 등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과 정책을 기술한 것이다. 핵심은 권농 정책으로, 권농관(勸農官)의 설치, 권농 절목 마련, 농서 반포, 수차(水車) 보급, 양전과 조세의 공평, 농지 확장 등을 주장하였고, 무위도식자나 부유자(浮遊者)를 엄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하영은 상업적 농업과 시장 경제에 의한 정당한 이윤 추구를 인정하였고, 공명첩(空名帖)에 의한 부농의 신분 상승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농민층의 분화에 의한 공동체의 해체를 우려하였고, 상민들의 양반 멸시와 같은 사회풍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광작(廣作)을 비판하고, 화성장시(華城場市)에서 외부 행상의 금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무책인 「수원유생우하영경륜(水原儒生禹夏永經綸)」과 『천일록(千一錄)』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 78-1번지에 있다. '추연 우성전 묘역(우하영 묘역 포함)'으로 명명되어, 2003년 4월 21일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