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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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體乾 |
영어공식명칭 | Kim Chaeg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완 |
출생 시기/일시 | 1605년 - 김체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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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김체건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김체건 훈련도감 초관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김체건 곡산군수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김체건 경상도 수군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김체건 전라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643년 - 김체건 경상좌수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김체건 영병장(領兵將)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김체건 호선대장(護船大將)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김체건 함경도 북병사 |
몰년 시기/일시 | 1667년 - 김체건 사망 |
묘소|단소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장포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해풍(海豊) |
대표 관직 | 전라도 병마절도사|경상좌수사|평안도 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해풍(海豊). 조부는 김우추, 부친은 병마절제사 김형(金瑩)이다. 형제는 김대건(金大乾)과 김시건(金始乾)이 있다.
[활동 사항]
김체건(金體乾)[1605~1667]은 무과에 급제하기 전인 1622년(광해군 14) 18세의 나이에 큰형 김대건으로부터 별대가(別代加)를 받아 조산대부(종4품)가 되었다. 1633년(인조 11) 2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김체건이 활약하던 시기는 후금(後金)이 강성하여지면서 대외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시기이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친 김체건은 1636년(인조 14) 8월 훈련도감 초관으로서 평안도 수자리를 교제한 포수 2백 명을 거느리고 안주로 떠났다.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체건은 병마절도사 유림(柳琳)을 수행하여 김화 백수봉에서 근왕병 2,000명, 의용병 300명으로 적군을 유인하여 섬멸하는데 일조하였다. 1638년(인조 16)에 곡산군수로 임명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1639년(인조 17) 35세의 나이로 경상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고, 164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643년(인조 21) 경상좌수사에 임명되었고, 그 해 가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김체건은 일 처리가 기민하고 용맹한데다, ‘문필을 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년간 지방의 최고 군사 책임자를 역임하던 김체건은 1644년 영병장(領兵將)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청나라는 요동의 금주(錦州)를 정복하기 위하여 조선에 파병과 군사 물자를 요구하였고, 1644년 4월 북경을 점령하자 조선에서도 1644년 7월 영병장 김체건을 금주가 아닌 북경 쪽으로 파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는 세폐를 나르는 선박을 보호하는 호선대장(護船大將)에 발탁되었다가, 심양에서 북경까지 육로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657년(효종 8)에 함경도 북병사를 역임하였으며, 1660년과 1661년 통제사 및 북병사, 총융사의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
[묘소]
묘소가 쌍부(雙阜)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장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김체건 청선비(金體乾淸善碑)는 1645년 12월 김체건이 세 번째로 경상 좌수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때 세워졌고, 현재 부산의 수영 사적 공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