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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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裕孫 |
영어공식명칭 | Hong Yu-son |
이칭/별칭 | 여경(餘慶),소총(篠䕺),소총자(篠叢子),광진자(狂眞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송양섭 |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조선 전기 학자.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이다. 아버지는 남양부(南陽府)의 향리(鄕吏) 홍순치(洪順致)이다.
[활동 사항]
홍유손(洪裕孫)[?~1529]은 남양부[현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났다. 5세부터 신동(神童)이라 일컬어졌으며, 1463년(세조 9) 12세에는 세조가 별전(別殿)에 불러 시를 짓게 할 정도로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481년(성종 12) 남양부사 채수(蔡壽)가 문장에 능한 그를 알아보고 향역을 면하여 주었고, 홍유손은 영남(嶺南)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김종직은 그를 안회(顔回)에 빗대어 칭찬하였으며, 함께 공부하던 자들도 모두 홍유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당대의 명사(名士)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 등과 가깝게 지내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홍유손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1510년(중종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홍지성(洪至誠)을 얻었으나, 1529년(중종 24)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금강산(金剛山) 석벽(石壁)에 쓴 시는 세간에서 신선이 쓴 작품이라 거론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2권 1책의 『소총유고(篠叢遺稿)』가 남아 전한다. 홍유손의 8세손 홍술조(洪述祖)가 1810년(순조 10)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상권(上卷)에는 21편의 글이 문체별로 수록되어 있으며, 하권(下卷)에는 시(詩) 72수가, 부록에는 행장(行狀)과 유사(遺事)가 실려있다.
[묘소]
사후 문인(門人)이었던 참의(參議) 김헌윤(金憲胤)·도정(都正) 윤진(尹珍)·참판 김홍윤(金弘胤)·의정(議政) 이장길((李長吉) 등이 재정을 모아 양주(楊州) 불암산(佛巖山)에 장사를 지내었다고 전해지나, 장소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