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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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聖期 |
영어공식명칭 | Jo Sung-gi |
이칭/별칭 | 졸수재(拙修齋),성경(成卿),졸수재집(拙修齋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양섭 |
출생 시기/일시 | 1638년 - 조성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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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조성기 「퇴율양선생사단칠정인도이기설후변(退栗兩先生四端七情人道理氣說後辨)」을 지음 |
활동 시기/일시 | 1676년 - 조성기 사제(舍弟) 조창기(趙昌期)의 제문을 지음 |
활동 시기/일시 | 1686년 - 조성기 중씨(仲氏) 조현기(趙顯期)의 제문을 지음 |
활동 시기/일시 | 1688년 - 조성기 며느리 함양(咸陽) 박씨(朴氏)의 제문을 지음 |
몰년 시기/일시 | 1689년 - 조성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30년 - 조성기 증직 |
묘소|단소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유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임천(林川)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유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가계]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성경(成卿), 호는 졸수재(拙修齋)이며, 할아버지는 조희진(趙希進), 아버지는 군수 조시형(趙時馨), 어머니 청송 심씨는 참의 심정양(沈廷揚)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조원기(趙遠期), 인천부사를 지낸 조현기(趙顯期), 사간원 사간이었던 조창기(趙昌期), 경기관찰사를 지낸 조형기(趙亨期) 등이 형제이다.
[활동 사항]
조성기(趙聖期)[1638~1689]는 1638년(인조 16)에 태어났다. 출사하지 않았지만,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거유(巨儒)로 꼽혔다. 조성기는 젊은 시절 병을 얻은 탓에 칩거하며 평생을 독서와 학문에만 힘쓰고 경사(經史)를 연구하였다. 20세에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논변하였는데, 이 글은 묘지명에 인용되어 김창흡(金昌翕)의 찬사를 받으며 대표작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조성기는 18세기 전반 낙론계의 종장(宗匠)이 된 김창협(金昌協)·김창흡 형제와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주었고, 임영(林泳)과는 가까운 친척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벼슬에 나가지 않았음에도 이름이 알려졌으며, 『허생전(許生傳)』에서는 초야에 묻혀 살던 대표적인 학자로 언급되었고, 『숙종실록』에도 박식한 처사(處士)로 기록되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졸수재집(拙修齋集)』이 있다. 조성기의 시문을 아들 조정례(趙正禮)가 수습하여 초간본이 간행되었다. 1710년(숙종 36) 조정례가 봉화현감을 지내면서 조성기의 행장 등을 편집하여 봉화현에서 목판본 12권 6책의 중간본을 간행하였다. 권1~2는 시(詩) 500수, 권3~10은 서(書) 90편, 권11은 잡저(雜著), 권12는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한문소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남겼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유리(柳里) 건달산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경기도 화성의 주산인 건달산을 배산으로 하고, 남쪽으로는 냇물이 모인 저수지가 있는 유리의 가장 위쪽에 그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이 놓여있다. 봉분 우측에는 1714년(숙종 40) 5월 건립한 묘표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 좌우측 끝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있다.
[상훈과 추모]
1730년(영조 6) 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조성기를 포양할 것을 청하자, 영조가 특별히 증직(贈職)을 내리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