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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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秀 |
영어공식명칭 | Yi Sisu |
이칭/별칭 | 치가(稚可),급건(及健),충정(忠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양섭 |
출생 시기/일시 | 1745년 - 이시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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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1년 - 이시수 식년 생원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773년 윤3월 12일 - 이시수 문과 증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73년 윤3월 19일 - 이시수 승정원 가주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80년 2월 26일 - 이시수 홍문관 부교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83년 6월 24일 - 이시수 춘천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90년 2월 3일 - 이시수 황해도관찰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95년 1월 17일 - 이시수 공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98년 4월 21일 - 이시수 남양의 풍흉상황을 조정에 보고 |
활동 시기/일시 | 1800년 6월 29일 - 이시수 좌의정 임명, 총호사로 건릉 조성을 관장 |
활동 시기/일시 | 1806년 8월 24일 - 이시수 남양에 있는 선영에 성묘 |
몰년 시기/일시 | 1821년 8월 20일 - 이시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22년 3월 12일 - 이시수 충정(忠正) 시호를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836년 10월 11일 - 이시수 순조 묘정에 배향 |
출생지 | 경기도 남양부[현 화성시] |
부임|활동지 | 건릉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45 |
묘소|단소 | 이시수 묘소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산40-23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연안(延安) |
대표 관직 | 공조판서|우의정|좌의정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선영과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치가(稚可), 호는 급건(及健),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이시수는 남양부 쌍부[현 화성시 우정읍·장안면 일대]에 거주하였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7대손으로, 증조부는 경기감사를 지낸 이정신((李正臣), 조부는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철보((李喆輔),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이복원(李福源)이며,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태릉참봉을 역임한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동생으로 수원유수를 지낸 이만수((李晩秀)가 있다.
[활동 사항]
이시수(李時秀)[1745~1821]는 1745년(영조 21) 경기도 남양에서 태어났다. 1771년(영조 47) 식년 생원시에 3등으로 입격하였다. 1773년(영조 4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에 제수되었다. 1780년(정조 4)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으며, 1783년(정조 7) 춘천부사을 역임하며 영동선유사를 겸하여 강원도 영동 지역의 진휼에 힘썼다. 1790년(정조 14)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795년(정조 19) 공조판서가 되었다. 1799년(정조 23)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좌의정으로 옮겼다. 1802년(순조 2) 영의정이 되면서 순조 집권 초기 주요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당시 사관은 이시수가 치밀하고 기민하게 행동하였으며, 처세와 처신을 잘하였다고 평하였는데, 그의 관직 이력은 이를 잘 보여준다. 1804년(순조 4) 6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05년(순조 5) 동지정사(冬至正使)로, 1812년(순조 12) 왕세자 책봉에 대한 진주 겸 주청정사(陳奏兼奏請正使)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시수는 관료로 활동하면서 5차례 이상 집안의 세장지가 있는 경기도 남양부[현 경기도 화성시]에 성묘하였다. 경기도 남양의 사정에 밝았던 이시수는 1798년(정조 22) 4월 21일과 1799년(정조 23) 8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농사의 풍흉을 묻는 정조의 하문에 현지의 상황을 답변하기도 하였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는 총호사로 임명되어 정조의 국상과 건릉[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45] 조성을 관장하였다. 1821년(순조 21) 76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812년(순조 12) 진주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06운(韻) 3,212구(句), 16,060자(字) 분량의 『속북정시(續北征詩)』를 작성하였다. 『속북정시』에는 진주 겸 주청정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1812년 7월 6일부터 귀국하여 복명(復命)한 뒤 『속북정시』를 완성한 그해 12월 3일까지의 기록이 담겨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산40-23에 있다. 이시수의 묘소는 동생인 이만수와 아버지인 이복원의 묘 근처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22년(순조 22) 3월 12일 순조가 충정(忠正) 시호를 내렸다. 1836년(헌종 2)에는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