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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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趾善 |
영어공식명칭 | Yun Jiseon |
이칭/별칭 | 중린(仲麟),두포(杜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송림로11-21[송림리60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양섭 |
출생 시기/일시 | 1627년 - 윤지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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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윤지선 진사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3월 15일 - 윤지선 증광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3월 14일 - 윤지선 사간원 정언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74년 5월 19일 - 윤지선 이조좌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81년 3월 6일 - 윤지선 충청도관찰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윤지선 귀향 후 은거 |
활동 시기/일시 | 1694년 4월 3일 - 윤지선 형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6년 - 윤지선 우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8년 - 윤지선 기로소 입소 |
몰년 시기/일시 | 1704년 - 윤지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14년 - 윤지선 묘갈 건립 |
출생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
외가|처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
묘소|단소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송림로11-21[송림리605] |
성격 | 문무관인 |
성별 | 남성 |
본관 | 파평(坡平) |
대표 관직 | 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 |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린(仲麟), 호는 두포(杜浦)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윤엄(尹儼), 할아버지는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윤민헌(尹民獻),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윤강(尹絳)이며, 어머니 정씨는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정광성(鄭廣成)의 딸이다. 부인 홍씨는 승지를 지낸 홍헌(洪憲)의 딸이다. 동생으로는 윤지완(尹趾完)·윤지미(尹趾美)·윤지경(尹趾慶)이 있는데, 윤지완은 우의정을 지냈다.
[활동 사항]
윤지선(尹趾善)[1627~1704]은 아버지의 친가가 있는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선부동에서 성장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실시된 증광 진사시에서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62년(현종 3) 3월 15일 시행된 문과시험에서는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같은 시험에서 을과(乙科)로 합격한 동생 윤지완과 함께 출사하였다. 1667년(현종 8)에 사간원 정원에 임명되었고, 사헌부 지평·홍문관 부수찬 및 교리 등 삼사(三司)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74년(현종 15) 5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숙종 즉위 이후에는 능주목사·종성부사·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여 외직으로 나간 경우가 많았다. 1683년(숙종 9) 노론과 소론의 분당 과정에서 소론을 지지하여 도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이조참의·대사헌·이조참판·광주유수·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윤지선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실각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형조판서·예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696년(숙종 22)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1698년(숙종 24) 기로소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를 지내었으며, 판중추부사로 있을 때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함경도관찰사 시절 흉년이 들자 진휼에 힘썼으며, 숙종 대 후반에는 중앙에서 그의 동생 윤지완·남구만·서문중 등과 함께 탕평 노선을 주도하였다.
[학문과 저술]
1943년 오세창이 엮은 『근묵(槿墨)』에 윤지선이 성주목사로부터 단오 부채를 받고 보낸 간찰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송림로 11-21[송림리 605]에 있으며, 부인 남양 홍씨와 합장되었다. 윤지선의 장인 홍헌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사길12번길 34[홍법리 산 30]에 있는 '화성 홍법리 남양 홍씨 묘역' 조성에 기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윤지선의 봉분 옆에 동생 윤지인이 1714년(숙종 40) 묘갈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