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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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振道 |
이칭/별칭 | 자유(子由),청회(聽檜),충목(忠穆),남양군(南陽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성재 |
출생 시기/일시 | 1584년 - 홍진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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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홍진도 별제, 목천현감으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홍진도 인조반정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홍진도 정사공신 3등에 책록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홍진도 공주목사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홍진도 병자호란, 남한산성으로 호종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홍진도 자헌대부로 승급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홍진도 도총관, 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홍진도 사은 겸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
몰년 시기/일시 | 1649년 - 홍진도 사망 |
묘소|단소 | 화성 홍법리 남양홍씨 묘역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사길12번길 34 |
성격 | 문관 |
성별 | 님 |
본관 | 남양(南陽) |
대표 관직 |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판중추부사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일대에 세거한 남양 홍씨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유(子由), 호는 청회(聽檜).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홍희(洪喜)이며, 어머니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증된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인조의 어머니인 추존왕 원종(元宗)의 비 인헌왕후(仁獻王后)와 홍진도의 어머니가 자매로, 인조와 이종사촌 형제가 된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참판(參判) 윤중삼(尹重三)의 딸이다. 아들 홍부(洪溥)가 있다.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하고 후에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낸 홍진문(洪振文)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홍진도(洪振道)[1584~1649]는 1584년에 태어났다. 1613년(광해군 5)에 첫 벼슬로 별제(別提)를 거쳐 의금부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목천현감(木川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림에 토호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능양군(綾陽君)을 후원하여 구사맹의 아들인 구굉(具宏), 신경진(申景禛) 등과 모의하니, 아우 홍진문(洪振文)도 이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이복 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을 역모로 처형하자, 능창군의 형인 능양군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집을 반환하자, 홍진도는 자기 집을 능양군에게 주어 기거하게 하였다. 능양군이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의 상을 당했을 때도 광해군의 의심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끝까지 장례를 치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공조좌랑에 특진되고, 이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광해군의 이배(移配)를 담당하였다. 1625년 부평부사·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1631년 공주목사가 되어 도적들을 제거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한성부 우윤(右尹)을 거쳐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신경진 등과 함께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 1637년 왕을 호종한 공로로 자헌대부가 되어다.
1644년 모친상을 마친 뒤 도총관, 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거쳐, 1645년(인조 23) 사은 겸 주청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온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고, 벼슬이 판의금부사·한성부 판윤·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49년 12월 66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화성홍법리남양홍씨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