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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19
한자 水原 李氏
영어공식명칭 Suwon Lee Family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권기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수원 - 경기도 수원시
세거|집성지 수원 이씨 집성촌 -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노하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수원 이씨 시조 묘 - 충청남도 청양군 창양읍 교월리
성씨 시조 이자송

[정의]

이자송을 시조로 하는 경기도 화성시의 세거 성씨.

[연원]

수원 이씨 시조인 이자송(李子松)은 고려 후기 순위부(巡衛府) 상만호(上萬戶),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등을 지낸 문신으로, 본래 청양(靑陽)[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사람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362년(공민왕 11)에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원나라에 있었는데,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 가담하지 않은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단성보조공신(端誠輔祚功臣)에 봉하여졌다. 1382년(우왕 8) 6월 수문하시중에 올랐고, 우왕의 한양 천도 때 송도유수(松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382년 11월 왕이 말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 홍영통(洪永通)과 함께 간언하였다가 파직당하고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388년(우왕 14) 3월 최영이 우왕에게 요동 정벌을 권할 때 반대하다가 임견미(林堅味) 일당으로 몰려 장류(杖流)에 처해졌다. 이어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가 결정되었으나 얼마 뒤에 죽임을 당하였다.

대표적인 조선 시대 수원 이씨 인물로는 대제학을 지낸 이장길(李長吉), 판밀직사(判密直事)를 지낸 이인기(李仁奇), 이조 참판에 오른 이인수(李仁壽)가 있다. 이 밖에도 호조 참판을 지낸 이효신(李孝信), 공조 참의를 지낸 이영(李嶺),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영석(李永碩)과 이징명(李徵明), 승지 이세만(李世萬), 공조 판서 이휘백(李輝白) 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수원 이씨는 이자송이 사망 후 수성부원군(隨城府院君)[수성은 수원의 별칭]으로 개봉(改封)된 것을 계기로 본관과 세거지를 수원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약간 다른 기록도 전한다. 이자송의 손자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이손(李孫)이 수성군에 봉하여지며 수원이 본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화성시가 수원부남양부에 나뉘어 속하였으므로, 현재 화성시 지역에도 수원 이씨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수원 이씨는 청양파(靑陽派), 보녕파(保寧派), 장동파(長洞派), 백천파(白川派), 고잠파(高岑派), 서산파(瑞山派), 화성파(華城派), 서흥파(瑞興派), 진위파(振威派) 등으로 나뉜다. 시조 묘는 충청남도 청양군 창양읍 교월리에 있으며, 향사(享祀)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지내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 모두 1,410명의 수원 이씨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화성시에 거주하는 인구는 70명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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