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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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城文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성재 |
편찬 시기/일시 | 1810년 이후 - 『봉성문여』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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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통문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47 |
성격 | 견문록 |
저자 | 이옥 |
간행자 | 김려 |
권책 | 『담정총서(藫庭叢書)』 권14 |
[정의]
1800년 경기도 화성 지역에 거주하던 이옥이 지은 영남 지방 견문록.
[개설]
봉성현(鳳城縣)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이다. 『봉성문여』는 이옥이 삼가현(三嘉縣)에 약 4개월간 머무르면서 지역의 유적과 환경 및 물산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다.
[저자]
조선 후기 문인인 이옥(李鈺)은 문체(文體) 때문에 정조에게 견책을 받고 1799년(정조 23) 영남의 삼가(三嘉)[현재 경상도 봉성] 지방에 충군(充軍)되었다. 1800년 2월 나라에 경사가 있어 실시하는 과거[경과(慶科)]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에 사면을 받아 집을 떠난 지 118일 만에 귀경하였다. 귀경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797년 서울 백문(白門)[서대문] 부근에 있던 서울집을 완전히 처분했기 때문에 귀경이라고 해도 경기도 화성[남양]에 있는 고향으로 귀향한 것으로 보인다.
[편찬/간행 경위]
『봉성문여』를 집필한 구체적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소서(小敍)에 '봉성에서 돌아온 후 경신년(1800) 5월 하순에 화석정사(花石精舍)에서 쓴다.'라는 구절을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글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완성되었으며, 화석정사는 화석(花石)이라는 이옥의 호를 따서 부르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이옥의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봉성문여』는 원래 이옥 자신은 '봉성필(鳳城筆)'이라고 하였으나 김려(金鑢)가 자신의 문집인 『담정총서(藫庭叢書)』에서 문여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찬해 넣으면서 『봉성문여(鳳城文餘)』가 되었다. 김려는 '비록 문(文)의 정체(正體)는 아니지만 기실 문의 나머지[文餘]이다.'라고 하였다. 인물이나 사건의 핵심적 부면만 제시하여 편폭이 대단히 짧고, 그 가운데 세태를 다룬 글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문의 정체'가 아니라고 한 것 같다. 『봉성문여』는 따로 편찬되지 않고 김려가 1810년(순조 10) 이후에 편찬한 『담정총서』 권14에 수록되었다.
[형태/서지]
『봉성문여』는 통문관(通文館) 이겸로(李謙魯)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국내 유일본이다. 2014년 학자원에서 영인하여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봉성문여』는 6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끝에 수록된 '추기남정시말(追記南程始末)'과 '소서'를 제외한 65편은 삼가, 합천(陜川), 성주 지방에서 직접 보고 들은 생활 풍속과 무속(巫俗), 구비 설화, 건물, 승경 등을 기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성주 지방의 옷차림, 영등굿이나 무가, 시장 풍속, 열부(烈婦), 황계폭포 구경 등이다. '제석제선(除夕祭先)'에서는 서울과 다른 지방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떡국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영남의 하층 백성들은 떡국을 사용하지 않고, 섣달 그믐날 정오에 밥과 국, 어육과 주과로 흠향한다고 소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봉성문여』는 서울을 포함하여 이옥이 거주하고 있던 경기도 화성 지역과 대비하여 영남 삼가 지역의 풍속과 언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