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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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顯隆園誌 |
이칭/별칭 | 현륭원지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성재 |
[정의]
1789년 경기도 화성시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정조가 쓴 글.
[제작 발급 경위]
「현륭원지」는 1789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부 화산으로 천장하고 원호를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면서 영조가 친히 썼던 지문을 대신해 새롭게 지문을 지은 것이다. 지문은 죽은 사람의 이름, 생몰연원일, 행적, 무덤이 있는 곳과 좌향 등을 쓴 글이다.
[형태]
표제는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이다. 붉은 실의 5침 선장본(線裝本)으로 표지는 만자(卍字) 무늬의 황색 표지이다. 1책 29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이는 두꺼운 저지(楮紙)를 사용하였다. 필사본으로 10행 19자이다.
[구성/내용]
「현륭원지」는 원(園)의 위치와 좌향, 작성 경위, 이름과 가계,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행록(行錄), 사후 관련 사건과 이후 영조와 정조의 추모 사실까지 연대순으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왕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거듭 피력하였다. 사도세자가 요순을 지향하였으며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고 유학에 밝았으며 대리청정 때 항상 백성을 위한 정사를 펼쳤던 사실을 여러 차례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세자가 저군(儲君)으로 자질을 보였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사도세자의 성장과정과 대리청정 기간의 업적을 서술한 것은 혜경궁(惠慶宮)이 지은 『한중록(閑中錄)』과 유사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밖에도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정치 의리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는 점을 부각하였고, 임오화변 이후 영조가 후회하는 마음을 표현했던 사례들을 찾아내어 서술하였으며, 사도세자에 대한 역적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동시에 충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영조가 묘지문에서 언급한 세자의 질병과 과오를 상세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질병이나 과오보다 오히려 공덕을 서술하는데 치중하였다. 병증은 인정하였지만, 그것이 공덕을 해치지는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내용은 정조의 입장에서 판단한 임오화변의 원인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끝에는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궁원의 호칭을 개정하며 존호를 추가해 올린 사실과 2남 2녀의 자손에 대해 기록하였다.
정조는 1789년에 사도세자의 행장을 썼는데 서두의 찬술 동기와 말미의 자손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면 지문과 거의 일치한다. 「현륭원지」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에 '현륭원지(顯隆園志)'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