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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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棨先生殉節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39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혜린 |
건립 시기/일시 | 1668년 - 윤계선생순절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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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03년 - 윤계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36년 - 윤계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9월 3일 - 윤계선생순절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지정 |
현 소재지 | 윤계선생순절비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392-1 |
성격 | 순절비 |
양식 | 방부원수 |
관련 인물 | 윤계 |
재질 | 대리석[비신]|화강암[방부]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78㎝[비신 높이]|75㎝[비신 폭]|23㎝[비신 두께]|127㎝[기단 가로]|92㎝[기단 세로]|20㎝[기단 높이] |
관리자 | 화성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윤계의 행적을 새긴 비.
[건립 경위]
윤계선생순절비는 조선 후기 문신 윤계(尹棨)[1603~1636]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윤계의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는 신곡(薪谷)이다. 1636년(인조 14) 남양도호부에 부사로 파견되어 공무를 시작하였는데,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침략 소식을 들은 윤계는 전열을 다듬어 청군과 맞서고자 하였으나, 남양도호부 사람들과 군사들 대부분은 홍법사(洪法寺)로 후퇴하였다. 윤계는 도호부 수장인 부사가 관아를 비우고 물러날 수 없다면서 후퇴를 거부하고 맞서 싸웠지만, 청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관아 뜰에 깃발을 세우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윤계가 순절한 지 10여 년이 지난 1650년(효종 1) 조정에서 윤계에게 이조 참판 벼슬을 내렸고, 1668년(현종 9)에는 읍민들이 윤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순절비는 남양부 관아에서 5리[1.96㎞]쯤 떨어진 오리정(五里亭) 앞에 세워졌는데, 남양부를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야 하는 자리였다.
[위치]
윤계선생순절비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392-1에 있다.
[형태]
윤계선생순절비는 사각형의 받침돌에 윗면이 둥근 비신(碑身)을 세운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방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방부 윗면에는 복련(覆蓮)[연잎 문양]을 장식하였다.
[금석문]
윤계선생순절비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글씨를 썼다. 전액(篆額) ‘부사증참판공순절비(府使贈參判公殉節碑)’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