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44 |
---|---|
한자 | 華城-寺址 |
이칭/별칭 | 사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성재 |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의 절이 있던 자리.
[개설]
화성 지역의 절터는 대부분 고려·조선 시대에 절이었던 곳이며, 석탑과 석축 등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산지에 있어서 산지 가람 형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지 가람의 경우 축대를 조성하여 터를 만들고, 그 위에 불전과 탑, 요사 등을 만들었다.
[변천]
기록으로 전하는 화성시의 불교 유적은 24개지만, 대부분 소실되었거나 대대적인 중창을 거쳐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 중 소실되어 옛 터만 남은 화성의 절터는 발굴 조사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아서 정확한 가람 배치를 알 수 없다. 다만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과 석축 등을 통해 산지 가람의 형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절터에 근래 운영되는 사찰도 여러 곳이 있다. 가령 만의사의 옛 절터에는 법화종 소속 원각사(圓覺寺)가 들어서 있고, 신흥사는 당성 내 2m 크기의 석불이 남아있던 곳에 1934년 새롭게 창건된 사찰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화성 지역의 절터에 대해 10곳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소재지를 알 수 없는 8곳은 문헌 조사만 이루어졌다.
(1) 관항리사지(官項里寺址)
관항리사지는 관항1리 마을회관 동쪽과 북쪽 일대로 관항리 삼층석탑으로 알려져 왔던 곳이다. 예전부터 이곳에 탑이 있다 하여 ‘탑상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현재 삼층석탑은 1층 옥개석을 제외하고는 탑부재가 아니거나 새로운 부재를 끼워 넣은 것으로 원 위치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사찰은 탑재 및 산포 유물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전기 경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전기 경까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괘랑리남산골사지(掛囊里남산골寺址)
괘랑리 남산골사지는 괘랑리 마을의 북서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지형이 많이 변했으나 3단 축대가 남아 있었다는 기존 보고서와 현재 경작지를 종합해서 볼 때 크게 3~4단 정도의 평탄지에 사역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지표에서 채집되는 유물 등으로 볼 때 사찰의 운영시기는 고려시대 중기에서 조선시대 전기까지로 판단된다.
(3) 만의사지(萬儀寺址)
만의사지는 현재 원각사가 들어서 있는 곳에 위치한다. 『동문선』에 “수원만의사축상화엄법화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會衆目記)”가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수원도호부 불우조(佛宇條)에는 위화도회군 당시 승려 신조(神照)가 큰 계책에 참여하여, 공양왕이 특별히 공패(功牌)를 주어 이 절을 맡게 하고 인하여 노비와 토지를 주었다고 한다. 한편 『숙종실록』에 숙종 5년, 10년의 기사, 『정조실록』 정조 5년의 기사에 만의사가 언급되어 있다. 1669년에 만의사가 송시열의 초장지로 정해지면서 부득이 사찰을 현재의 중리로 옮긴 후, 1888년 현 위치에 원각사가 중창되었다.
(4) 세곡리사지(細谷里寺址)
세곡리사지는 흰돌산기도원 주차장 위쪽 야산의 정상 능성부에 있다. 현재 야영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평지의 북동향으로 지형상 4단의 토단이 형성되어 있으나, 건물지 유구인지는 알 수 없다. 과거 석탑, 석불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을 수 없다. 사찰의 명칭 및 연혁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 산포된 유물의 특성상 고려후기~조선전기 무렵에 운영되던 사찰로 추정된다.
(5) 유리사지(柳里寺址)
유리사지는 건달산 중턱 넘어 계곡에 있는 해병대 사령부 내 화생방 교육장 아래 산 능선부에 위치한다. 현재 평탄지 좌우로 낮은 능선으로 둘러져 있으며, 정면으로 트인 시야가 확보된다. 2단의 석축이 확인되나, 군 전술도로 개설과정에서 상당 부분 복토되어 사역의 후면부 확인이 어렵다. 사찰의 명칭 및 연혁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 유물의 양상을 통하여 고려후기부터 조선중기까지 유지되던 사찰로 추정된다.
(6) 사나사지(舍那寺址)
사나사지는 기천리 아랫사내마을 북서쪽의 건달산에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야산 남서쪽 계곡부 주변 방골 안쪽에 위치한다. 세종6년 3월 16일 기사에 사나사에서 주전(鑄錢)을 한다고 하여, 조선 초기에도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남양도호부 불우조(佛宇條)에는 ‘사나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와 『범우고』에는 ‘건달산가지사(乾達山迦支寺)’로 기록되어 있으며 폐사되었다고 전한여 18세기 중반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역 내에 초석으로 추정되는 방형 치석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어, 4X3칸 정도의 건물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대에서 ‘가지사(迦智寺)’명 명문와 등을 비롯한 기와편, 토기편, 백자편이 확인된다.
(7) 백곡리사지(白谷里寺址)
백곡리사지는 육일리에서 백곡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오른쪽 능선에 위치한다. 사찰의 정확한 명칭 및 연혁은 알 수 없다. 예전의 지표조사에서 ‘백사(白寺)’ 명문와가 발견되었다. 이 일대에 대하여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2005년 발굴조사를 하였다. 현재는 복토되어 2008년 신축 건물이 들어섰고 대부분의 지역은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어 유구 및 유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인근지역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의 저장구덩이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가마, 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8) 어른리절골사지(漁隱里절골寺址)
어은리절골사지는 소남산 북쪽 계곡 안쪽에 위치한다. 현재 경작지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 농로가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구는 발견되지 않으나, 일대에서 무문 와편, 사격자문 기와편, 집선문 기와편 등과 토기편, 17세기 이후의 백자편 등이 발견되며, 발견 유물 중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월일(月日)’, ‘병(丙)’, ‘해주(海主?)’ 등이 새겨진 명문화가 포함되어 있다. 남쪽에 방형의 구덩이가 있는데, 절의 우물로 전해진다.
(9) 장외리사지(檣外里寺址)
장외리사지는 문화체험학교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150m 정도 오른 산 중턱에 위치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10~12m 내외로, 동서쪽 끝단부는 축대 상면이 무너진 상태이다. 석축 상부에는 소규모의 건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석축 앞에서 확인되는 기와편과 자기편으로 볼 때 조선시대 전기에서 조선시대 후기 경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칠보암지(七寶庵址)
칠보암지는 칠보산 동남쪽에 위치한다. 『사탑고적고』에 ‘천천리(泉川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연혁은 알려지지 않는다. 천천리에 있는 2개의 절터 중 큰절터로 불리는 곳이다. 3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장 하단에는 현재 건물 1동이 들어서 있으며, 중단은 기도원이 위치한다. 산포유물 등으로 볼 때 조선전기 경에 창건되어 조선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1) 소재지 미상 절터
그 외 소재지가 미상인 사찰은 다음과 같다.
관화사(貫華寺)의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태종실록』 태종 7년(1407)의 기사에 ‘왕이 새 전각을 희사하여 흥덕사(興德寺)라는 절을 창건하였고, 남양 관화사(貫華寺)를 혁파하여 그 땅과 백성을 옮겨주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1407년경 왕이 새 절을 창건하며 혁파된 사찰일 것으로 추정된다.
만봉암(萬峰菴)은 『여지도서』, 『범우고』에는 ‘공이향갈동(工以鄕葛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룡사(盤龍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수원도호부 불우조에 ‘수원부 객사의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 『범우고』에 18세기 중반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산암(柏山庵)은 『여지도서』, 『범우고』에 ‘쌍부산(雙阜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봉사(飛鳳寺)는 『여지도서』, 『가람고』에 ‘부 동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복사(新福寺)는 『여지도서』, 『범우고』에 ‘광덕산(廣德山)에 있다’고 하였다.
오동사(梧桐寺)는 『여지도서』, 『범우고』에 ‘서봉산(棲鳳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생사(長生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남양도호부 불우조에는 ‘절명산(絶命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범우고』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세기 이전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화성시에는 소재지를 알 수 있는 절터가 10개, 소재지와 연혁을 알 수 없는 절터가 8개가 있다. 소재지를 알 수 있는 10개는 정남면에 관항리사지와 괘랑리남산골사지, 봉담읍에 세곡리사지와 유리사지, 팔탄면에 사나사지 , 마도면에 백곡리사지, 장안면에 어은리절골사지, 서신면에 장외리사지, 매송면에 칠보암지, 동탄면에 만의사지이다. 소재지를 알 수 없는 절터는 관화사, 만봉암, 반룡사, 백산암, 비봉사, 신복사, 오동사, 장생사이다.
화성의 절터는 대부분 산이나 구릉에 자리하여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민묘나 민가가 조성되어 있다. 이로 인해 사찰의 건축물에 사용되었던 초석이나 기단석 등이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 축대는 밭 경작과 관련하여 인위적인 훼손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절터의 경우 관리의 손길에서 멀어져 이미 상당 부분 파괴 또는 변형된 상황이며 앞으로도 점진적인 훼손이 우려된다.
[의의와 평가]
화성 지역은 곳곳에 절터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읍내동 사지를 제외하면 규모는 대부분 작은 편이다. 사지에 석탑을 비롯해 석불,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매우 드물다. 이미 훼손과 변형이 진행되어 초석이 남아 있는 곳도 거의 없으며 축대 등이 확인되는 경우는 여러 곳이 있다. 상당수의 사지 주변에서는 기와편을 비롯한 토기편, 자기편 등이 발견된다. 화성의 절터는 화성 지역의 사찰 분포를 살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번성했던 불교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