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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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閑角里 廣場-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한각리 568-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여희진 |
소재지 | 한각리 광장 터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한각리 5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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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유적지 |
관리자 | 화성시|화성시문화재단 |
[정의]
1919년 4월 3일 만세 시위꾼들이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 모인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있는 광장 터.
[개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경기도 화성 우정·장안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시위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4월 3일, 주곡리와 석포리, 그리고 수촌리 주민 약 200여 명 정도가 1차 목표지인 어은리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장안면사무소 건물과 집기류를 파괴하고, 각종 서류를 불태웠다. 면사무소는 일제 식민 통치의 행정 최말단 기구로서 세금 징수, 불평등한 처벌 등 가혹 행위를 하던 곳이었다.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운 시위대는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는데, 장안·우정 지역 주민들이 모여들며 600~700명 정도로 수가 늘었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른 뒤 화산리 우정면사무소를 향하여 다시 출발하였다.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였을 때 시위대는 약 1,500여 명 정도로 불어나 있었고, 우정면장과 면서기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각종 서류를 전부 불태웠다.
이후 시위대는 우정면 각리와 죽리를 거쳐 한각리 광장에서 잠시 쉬며 최후 목적지인 화수리 경찰주재소 습격을 위한 전술을 세웠다. 약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동쪽, 한 무리는 서쪽에서 전진하며 주재소로 진격하였다. 화수리 경찰주재소 인근에 당도한 군중들은 3패로 나뉘어 일제히 돌을 던지며 습격하였다. 주재소에는 일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와 조선인 순사보가 있었는데, 순사보 2명은 도망치고 가와바타는 권총을 쏘며 저항하였다. 가와바타의 총탄에 장안면 사곡리 이경백이 맞아 순국하면서, 시위대는 더욱 공격적이 되었다. 시위대는 도망가던 가와바타를 붙잡아 처단하고, 주재소를 모두 불태웠다.
[위치]
한각리 광장 터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한각리 568-1번지에 있다.
[현황]
한각리 광장 터는 2022년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다만, 화성시에 의해 '화성3·1운동만세길' 복원 사업이 이루어져 역사적 장소임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세워졌다.
[의의와 평가]
한각리 광장 터는 우정면사무소를 불태운 3·1운동 시위대가 식민 수탈과 주민 탄압이 가장 심하였던 화수리 경찰주재소로 가기 전 항일 의지를 불태우고, 사전 계획을 세운 역사적 현장이다. 당시 만세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몰려든 인원은 약 2,500여 명에 달하였다고 추산된다. 우정·장안면 일대의 가구 수가 2,400호임을 고려할 때 매우 높은 수치의 인원으로, 당시 지역 주민 대부분이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정·장안 지역 만세 운동은 당시 경기도에서 전개되었던 3·1운동 중에서도 일본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를 처단하는 등 항쟁적 성격이 강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