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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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隋城崔氏 始祖墓 |
영어공식명칭 | Tomb of Choi Young-gyu, Founder of the Suseong Choi cl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81-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성남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7년 2월 28일 - 수성최씨 시조묘 화성시 향토문화유산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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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9년 10월 23일 - 수성최씨 시조묘 화성시 향토문화유산에서 화성시 기념물로 재분류 |
현 소재지 | 수성최씨 시조묘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81-1 |
성격 | 무덤 |
관련 인물 | 최영규 |
소유자 | 수성 최씨 문중 |
관리자 | 수성 최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화성시 기념물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에 있는 고려 시대 인물 최영규의 묘.
[개설]
수성최씨 시조묘는 수성 최씨 시조 최영규(崔永奎)의 무덤이다. 최영규는 원래 경주 김씨로,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13세손이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한 뒤 남조(南曹) 전서(典書) 겸 보문각(寶文閣) 대경(大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하다고 임금이 개탄하자, 최영규가 호장(戶長)으로 부임하기를 자청하여 백성을 교화시켰다고 한다. 공을 인정받아 1302년(충렬왕 28) 수성백(隋城伯)에 봉하여졌고, 아울러 최씨 성을 하사받았다.
[위치]
수성최씨 시조묘는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81-1번지 야산 중턱에 있다.
[형태]
수성최씨 시조묘는 부인 이천 서씨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무덤 뒤에는 사성이 둘려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왼쪽에는 이수를 올린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외에 봉분 주위로 장명등, 문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고, 묘역 좌우 끝에는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 2기가 동서로 나란히 북향하여 세워져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이 먼저 세운 비이다. 먼저 세운 신도비는 방부개석(方趺蓋石)[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형태] 양식이며, 추가로 세운 신도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다. 신도비 뒤편에는 재실이 자리하고 있다.
[금석문]
수성최씨 시조묘의 구 묘비에는 비신 앞면에 '수성백 시문혜공최영규지묘 배정경부인이천서씨부좌 병좌(隋城伯 諡文惠公崔英奎之墓 配貞敬夫人利川徐氏祔左 丙坐)'라고 적혀 있다. 새로 새운 묘비에는 비신 앞면에 '수성최씨시조 수성백시문혜공휘영규지묘 배정경부인이천서씨부좌(隋城崔氏始祖 隋城伯諡文惠公諱英奎之墓 配貞敬夫人利川徐氏 祔左)'라고 적혀 있다.
다음으로, 먼저 세운 신도비의 비제는 '수성백문혜공신도비명(隋城伯文惠公神道碑銘)'이다. 비문은 비신 앞면과 좌측면에 새겨져 있다. 송환기(宋煥箕)[1728~1807]가 글을 짓고, 황운조(黃運祚)[1730~1800]가 글씨를 썼으며, 유한지(兪漢芝)[1760~1834]가 전액(篆額)을 올렸다. '숭정기원후 삼경신 이월 일립(崇禎紀元後 三庚申 二月 日立)'이라고 새겨져 있어 1800년(정조 24)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신도비의 뒷면과 우측면에는 1937년에 윤녕구(尹甯求)가 추기한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글씨의 각자(刻字) 수법이 정교하지 못하고, 황운조와 유한지의 서풍(書風)도 그동안 알려진 범위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정확한 건립 시기에 대해 면밀한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1937년에 신도비 전체를 새로 각자하여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현황]
수성최씨 시조묘 봉분 왼쪽에 세워진 묘비는 근래에 새로 세운 것으로, 원래의 묘비는 묘역 하단부에 옮겨져 있다. 석물 역시 새로운 묘비가 들어설 때 새로 정비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도비도 원래는 1기였으나, 2018년에 1기를 더 추가하였다. 신도비 뒤편의 재실도 새로 건립한 것이다. 수성최씨 시조묘는 2007년 2월 28일 화성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0월 23일 화성시 기념물로 재분류되었다.
[의의와 평가]
수성최씨 시조묘는 원형에서 많이 변형되었으나, 수성 최씨 시조 최영규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향토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