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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403
이칭/별칭 요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손설빈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초기 국가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가마터.

[개설]

가마터는 가마의 흔적이 남은 곳을 지칭한다. 가마는 땅을 파거나 지붕을 덮어씌워 만든 시설로, 각종 토기, 도기, 자기, 벽돌, 기와 등을 넣고 고온에서 소성하였던 유구이다. 또한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숯가마[탄요]도 포함된다. 가마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연소실], 불로 유물을 굽는 소성실, 연기가 나가는 굴뚝[배연부], 아궁이의 재를 버리는 회구부로 구성된다. 구조에 따라 크게 한데가마[노천요(露天窯)]와 굴가마[등요(登窯)]로 구분된다.

[선사 시대~초기 국가 시대 가마터]

신석기~초기 철기 시대 토기 가마의 경우 한데가마로 생각되지만, 아직까지 화성 지역에서 명확히 확인된 사례는 없다.

초기 국가 시대 가마터는 팔탄면 가재리 유적에서 토기 가마 4기를 비롯하여 가마 관련 수혈 유구 2기, 공방 터 1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4호 가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마는 삭평이 심하여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유물은 두드림무늬 토기 편과 대옹 편이 출토되었다. 조업 시기는 자연 과학적인 분석 결과와 출토 유물로 볼 때 3세기 중엽으로 상정된다. 화성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 가마의 구조적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삼국 시대 가마터]

화성 지역 삼국 시대 가마터로는 동탄동 유적과 봉담읍 왕림리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특히 동탄동 유적에서는 대옹을 만들었던 가마가 발굴 조사되었다. 동탄동 가마는 재료와 생산물의 운송이 용이한 하천 변에 입지하며, 구릉 사면에 점토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가마는 요전부, 연소부, 소성부, 연도부의 세부 공간과 폐기장으로 구분된다. 가마의 구조는 장타원형의 반지하식 굴가마이며, 경사도는 15도 내외를 유지한다. 동탄동 가마에서 생산된 대옹은 동탄 일대의 유적군을 중심으로 유통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림리 가마터는 야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능선부 안쪽에 입지하며, 백제 토기 편이 지표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주변에서 가마골, 가마리 등의 지명이 확인되는 점도 왕림리에 가마가 있던 사실을 뒷받침하여준다.

한편, 화성 지역에서는 9개 유적에서 40기의 목탄요가 발굴되었다. 최근 연구 결과 화성 지역의 탄요는 측구가 많고 소성부의 길이가 긴 측구식 탄요로,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연구되었다. 측구식 탄요에서 생산된 목탄은 고대 제철 공정의 재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탄요 유적인 봉담읍 상리·수영리 유적 동쪽 약 3.5㎞ 지점에 고대 제철 유적인 기안동 유적이 있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상리·수영리 유적 이외에 화성 지역에서 확인된 탄요 유적은 향남읍 구문천리 유적, 향남2지구 유적, 동학산 유적, 반송 탄요유적공원 탄요지, 석우리 먹실 유적, 봉담읍 분천리 유적, 화산동 유적 등이 있다.

[고려·조선 시대 가마터]

고려·조선 시대 화성 지역 가마터는 봉담읍에서 왕림리 가마터, 수영리 가마터, 상리·수영리 가마터, 덕리 가마터, 비봉면에서 쌍학리 가마터1·2, 청요리 가마터, 팔탄면에서 가재리 가마터, 매곡리 가마터 등이 지표 및 발굴 조사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가마터는 가재리 유적에서 조사된 고려 시대 도기 가마터 2기, 조선 시대 도기 가마터 1기이다. 고려 시대 2호 가마의 경우, 연소실은 타원형의 평면을 보이며, 소성실은 연소실에서 7도의 경사로 내려가다가 단이 형성된 부분에서 시작된다. 소성실 바닥은 수혈상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으며, 연도부 쪽으로는 35도의 급한 경사를 보인다. 유물은 옹, 항아리, 자배기, 편병, 매병 등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었고, 유리질화된 경질 도기도 보인다. 조선 시대 도기 3호 가마의 소성실 바닥은 풍화 암반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20도 경사도로 연도부까지 이어진다. 벽면과 천장은 굴착 면에 점토를 다져 조성하였다. 소성실 말단의 바닥은 깬돌을 이용하였는데, 연도부와 관련된 석축 시설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은 연질 및 경질 토기 편과 이형 토제품, 백자 편, 분청사기 편 등이다.

한편, 기와 가마터는 수영리 유적에서 1기, 상리·수영리 유적에서 21기 발굴되었는데, 모두 고려 시대의 것이다. 상리·수영리 유적을 중심으로 기와 가마를 살펴보면, 소성부 평면은 장방형 또는 주형이고, 소성실 폭은 176㎝이다. 소성실의 경사도는 9~17도 정도이다. 연소실의 평면은 주로 역삼각형과 횡형이다. 소성부와 연소실 형태는 대체로 고려 시대에 이용되는 구조이다. 출토 유물은 어골 복합문이 타날된 기와가 중심을 이루는데, 어골문, 복합문, 격자문, 사격자문, 선문 등도 보인다. 기와 하단부는 건장치기 없이 물손질 조정만 확인된다. 기와의 문양 등으로 볼 때 11~12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고지자기 분석도 그 편년 범위 안에 들어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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