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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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岩里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팔탄면 고주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15일 - 제암리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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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16일 - 언더우드 선교사, 커티스 미국 부영사, 테일러 AP통신 경성 특파원 제암리 방문 조사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18일 - 스코필드 박사 제암리·고주리 사건 조사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19일 - 노블 선교사, 로이즈 영국 대리영사, 케이블 선교사 등 제암리 사건 조사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28일 - 뉴욕타임즈 제암리사건 보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6년 6월 - 3·1독립운동추모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9년 4월 22일 - 3·1운동순국기념탑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9월 - 제암리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안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12월 - 제암리 학살 현장 사적으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1년 -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개관 |
발생|시작 장소 | 제암교회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 |
종결 장소 | 김흥렬의 집 -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고주리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김흥렬|아리타 도시오 |
[정의]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일제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개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와 11명의 보병 및 경관이 함께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마을 주민들을 기독교회당에 소집하여 총을 쏘았고, 교회당과 마을에 불을 질렀다. 제암리사건은 기독교 선교사와 미국·영국 총영사관의 조사로 국제 사회에 알려졌으며, 일제의 만행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중에는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지만, 사전 계획에 의해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진행된 시위도 있었다.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전국에서 손에 꼽는 공세적 만세 시위였다. 3월 26~28일에 송산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는 1,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대대적인 시위였을 뿐만 아니라, 군중들이 탄압을 위해 파견된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을 처단한 공격적 성향을 보인 시위였다. 4월 3일에 일어난 장안·우정 지역의 만세 시위 역시 면민 대부분이 참여한 시위로, 마을 구장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주민들을 이끌었다. 시위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방화·파괴하였으며,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를 척살하였다.
[경과]
일제는 만세 시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수원경찰서에서 별도로 헌병·경찰 혼성 부대를 편성하였고, 장안·우정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검거 반원을 증원하여 총 32명의 특별검거반을 구성하였다. 일본군 병력도 파견되어 천안에 주둔하고 있던 79연대의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장에서 약 4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에 아리타 중위와 주재순사가 협력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아리타는 송산면과 우정면에서 일어난 일본인 순사 참살의 원인이 기독교도와 천도교도의 선동에 있었다고 보고, 화근을 없애기 위해 발안장에서 2㎞ 정도 거리에 있는 제암리로 출동하였다. 아리타를 포함한 일본군과 경관은 교회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쏜 후 불을 질렀다. 그 결과 제암리 주민 30여 명이 사망하고 가옥 28채가 전소하였다. 이어 팔탄면 고주리로 향하여 김흥렬의 집에서 김흥렬과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짚단과 나무로 덮어 석유를 뿌려 생화장을 하였다.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 전동례(田同禮)와 김순이(金順伊)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발안 장터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결과]
4월 16일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선교사와 미국 부영사 커티스(Raymond Curtis), AP통신 경성 특파원 테일러(A. W. Taylor)가 제암리를 방문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언더우드는 ‘일본군이 갑자기 나타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명령한 후 방화, 학살하여 3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진술서를 작성하였고, 언더우드의 진술서를 포함한 보고서가 미국에 알려졌다.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4월 17일에 ‘일본군이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가둔 뒤 집중 사격하여 모두 부상을 입히거나 죽였고, 그 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스코필드는 4월 18일 수원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서 내린 스코필드는 경찰의 저지를 피하고자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조사하였다. 조사를 마친 스코필드는 「제암리 대학살 보고서」를 작성하여 학살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보고서에는 제암리에서 교회에 모인 남자 23명과 여자 2명 등 25명, 고주리에서 6명이 희생되었다고 언급되었다.
4월 19일에는 노블 선교사 및 로이즈 영국 대리영사, 케이블 선교사 등이 연이어 제암리를 찾았다. 제암리사건이 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진 것은 4월 28일 자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보도되면서부터이다. 뉴욕타임즈 기사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탄압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도하며, 잔혹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독립운동 탄압을 고발하였다. 또 외국인들의 보고서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불타버린 교회와 시체들의 모습이 생생히 해외 언론에 소개되었다.
한편, 제암리사건의 주모자인 아리타 중위는 진압 수단에 부당한 요소가 있었다는 이유로 중근신(重謹愼) 30일의 행정 처분을 받았다가, 이후 군법 회의에 부쳐졌다. 그러나 아리타의 행위에 대해 ‘자기의 임무 수행상 필요한 수단이며, 당연히 하여야 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으로, 죄를 범하는 뜻이 없는 행위’라며 무죄가 선고되었다. 방화로 인한 가옥 소실도 실화이거나 주민들이 저지른 일이라 하여 면책시켜 주었다.
해방 후인 1946년 6월 3·1운동제암동희생자건비위원회가 제암리 마을 입구에 3·1독립운동추모비를 세우고, 희생자 안정옥·안봉순·강태성·김흥렬·안종린·안유순·안유순 부인 김씨·김성열·안종영·안종엽·홍원식·김세열·안종환·안필순·안필순 부인 김씨·김주남·안종후·안명순·홍순보·김주업·안경순·안관순·김정헌·김흥복·안무순·안상용·김덕용·안진순·조경칠의 이름을 새겼다. 1959년 4월 22일에는 향남면 3·1운동순국기념건립위원회에서 3·1운동순국기념탑을 세웠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삼일운동순국기념탑(三一運動殉國記念塔)'이라고 제목을 썼다. 탑명(塔銘)은 박종화(朴鐘和)가 글을 짓고 유근홍이 썼다. 1982년 9월에는 제암리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유해 안치를 시행하였고, 12월에 제암리 학살 현장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화성시는 2001년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을 개관하여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29명의 항일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발생한 일제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3·1운동 진압 중 일어난 잔혹한 탄압 중 하나였다.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은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들에게 목격되어 해외 언론에 소개됨으로써 일본의 식민 지배와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