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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70
한자 花梁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기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358년 이전 - 화량진 설치
개정 시기/일시 1473년 - 화량진에 경기수영 설치하고 수군절도사 파견
개정 시기/일시 1624년 - 화량진의 경기수영을 강화도로 이전
개정 시기/일시 1629년 - 화량진에 수군첨절제사 복구
개정 시기/일시 1653년 - 화량진의 속진이었던 영종포를 자연도로 이전
개정 시기/일시 1872년 - 화량진을 영흥도로 이전
관할 지역 화량진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역에 있던 조선 시대 수군 진영.

[제정 경위 및 목적]

화량진이 설치된 남양만 일대는 신라 시대 이래 서해안 지역의 교통·군사적 요지였다. 그러나 화량진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기 어려운데, 1358년(공민왕 7)에 왜적이 화지량(花之梁)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14세기 중반에는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화량진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남양만 지역이 갖는 지리적·군사적 중요성에 따라 경기도 남부 지역 방어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내용]

화량진은 조선 초기 경기도 지역 수군 체계에서 핵심을 담당하였다. 조선 정부는 1473년(성종 4) 화량진에 경기수영을 설치하고, 경기도 지역 수군을 총괄하는 수군절도사를 파견하였다. 화량진을 중심으로 왜구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화량진은 15세기 전반 당시 경기도 지역 수군 군선 84척 중 50척을 관리하였고, 경기도 수군 병력 5,792명 중 3,309명을 통괄하였다. 화량진의 이러한 병력 규모는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까지 이어졌다.

[변천]

화량진에 설치되었던 경기수영은 수영의 위치가 군사 전략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1624년(인조 2) 강화도로 이동하였다. 정묘호란 발생 후인 1629년(인조 7)에는 경기수영이 다시 교동[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으로 이전하면서 화량진에 수군첨절제사를 복구하였으나, 병자호란 당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효종 대에는 후금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강화도 중심의 방위 태세가 강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1653년(효종 4) 남양도호부 관할이었던 영종포가 강화도에 인접한 자연도[지금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방어 체계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대비하는 것에 집중되면서 화량진의 기능은 이전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다. 화량진은 고종 대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1872년(고종 9) 강화도 어구를 수비하기 위해 영흥도로 옮겨갔다.

[의의와 평가]

화량진은 조선 전기 경기도 지역 최대 규모의 수군 진영이었다. 당시 남양만 지역이 갖는 지리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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