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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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기중 |
[정의]
조선 시대에 도성과 경기도 화성 지역을 포함한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 제도.
[개설]
조선 시대에 화성 지역은 호서·호남 지방에서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자리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국가의 공적 도로망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화성 지역에 4개의 역을 설치하였다. 역에서는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 공공 물자 운송에 필요한 말 공급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한국에서 역(驛)은 삼국 시대에 최초로 설치되었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원제는 고려 때의 제도를 모방하여 편성되었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를 설정한 후 약 30여 리마다 역을 설치하였고, 각 역에는 평균 10여 필의 역마(驛馬)를 구비하였다. 역의 관리는 조선 초기에는 역승(驛丞), 조선 후기에는 찰방(察訪)이 담당하였다. 원(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 길목에 설치한 편의 시설이다. 원은 대체로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 역과 원을 합쳐 역원제라고 한다.
조선 정부는 역원제를 통해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물적 인적 연결망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방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역원제가 사용된 것이다. 화성 지역에 설치된 역에도 조선 정부의 이러한 목적이 반영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화성 지역 역과 관련된 내용은 『경국대전』, 『대전회통』,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양군읍지』 등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내용]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일대는 조선 시대에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나누어 관할하였다. 수원·남양 지역에는 모두 4개의 역이 있었는데, 수원도호부에 속한 역으로는 청호역(菁好驛)[지금의 경기도 오산시 대원동 소재], 동화역(同化驛)[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소재], 장족역(長足驛)[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소재]이 있었고, 남양도호부에 속한 역으로는 해문역(海門驛)[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소재]이 있었다. 당시 역은 외방 도로를 따라 설치되었는데, 외방 도로는 위치의 중요성에 따라 각기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로 구분되었다. 화성 지역 4개 역 중에서 청호역은 충청도의 성환도와 직결되는 교통의 중요성 때문에 중로에 속하였으며, 나머지 역은 소로에 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각 역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데, 청호역은 수원부 동쪽 25리, 장족역은 부의 동쪽 30리, 동화역은 부의 서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문역은 『남양군읍지』에 따르면 관아에서 약 20리 정도에 거리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화성 지역에는 역과 함께 3개의 원(院)도 있었다. 원의 이름은 오산원(烏山院), 사원(蛇院), 대제원(大弟院)이었으며, 역과 비슷한 곳에 있었다.
[변천]
조선 세종 대에 전국의 역로망을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정비하였는데, 화성 지역 4개 역은 동화도(同化道)에 속하였다. 이후 1462년(세조 8) 병조의 건의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였고, 화성 지역의 역은 양재도(良才道)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정조 대에 수원 신읍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양재도를 영화도(迎華道)로 개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해문역을 제외한 3개 역은 폐지되었다. 해문역은 이후 1896년 1월, 대한제국의 역 폐지와 관련한 칙령에 따라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화성 지역에 설치된 4개 역은 지리적 중요성에 입각하여 설치되었으며,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한 기능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