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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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都護府 |
영어공식명칭 | Namyang-Dohob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마도면|비봉면|송산면|서신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창훈 |
창설 시기/일시 | 1413년 - 남양도호부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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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895년 - 남양도호부에서 남양군으로 개편 |
소재지 | 남양도호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비봉면|송산면|서신면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화성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으로,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마도면·비봉면·송산면·서신면 등을 관할하였다. 읍치는 남양읍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남양도호부는 조선 초 1413년(태종 13) 지방 행정 구역 정비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인구는 조금 모자랐지만, 남양만 지역이 갖는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도호부로 편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 전기 남양만 일대에는 화량진과 영종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화량진의 경우 경기도 지역 수군을 총괄하는 경기수영이 있던 곳이다. 15세기 전반 당시 경기도 지역 수군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 화량진에 배치되어 있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남양도호부의 수령은 종3품 남양도호부사이다. 도호부사는 행정·군정·형정 등 지방 운영의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였다. 실제로 남양도호부사는 남양진병마첨절제사(南陽鎭兵馬僉節制使), 좌영장(左營將), 총융청(摠戎廳) 전영장(前營將), 좌토포사(左討捕使)를 겸직하였다. 남양도호부에는 좌수(座首) 1명과 별감(別監) 3명이 있었고, 군관(軍官)·아전(衙前)·지인(知印)·사령(使令)·군뢰(軍牢) 등의 관직은 정해진 숫자 없이 각기 업무를 담당하였다.
[관련 기록]
남양도호부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는 다음과 같이 연혁을 전하고 있다.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인데, 신라가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옛 이름[唐城]으로 복구하여, 현종(顯宗) 무오에 수주(水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인주(仁州)에 옮겨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 경인에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에 벼슬하여 정동행성 우승(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고, 뒤에 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34년 무신에 또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남양부(南陽府)로 강등되어,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이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관내 현황은 다음과 같다. 인구는 487호 778명,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2명, 선군(船軍) 145명이다. 토성(土姓)은 홍씨(洪氏)·송씨(宋氏)·방씨(房氏)·박씨(朴氏)·최씨(崔氏)·서씨(徐氏) 등이 있었다. 역(驛)은 해문역(海門驛), 관방은 영종포와 화지량[화량진], 봉화는 염불산과 해운산을 기록하고 있다. 또 대부도와 덕적도를 비롯한 남양만 일대의 관할 섬도 명시하였다.
[변천]
남양도호부는 1644년(인조 22) 역적 형(衡)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남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3년(효종 4) 복구되었다. 또 1665년(현종 6)에는 종이 주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남양현으로 강등되었고, 1674년(현종 15)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충이나 효를 거스르는 반역 사건이 발생하면 지방 행정 구역의 위상이 강등되는 일이 흔히 발생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때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