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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51
한자 水原都護府
영어공식명칭 Suwon-Dohob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경기도 화성시|수원시|오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창설 시기/일시 1271년연표보기 - 수주에서 수원도호부로 승격
폐지 시기/일시 1793년 - 수원도호부에서 화성유수부로 승격
소재지 수원도호부 - 경기도 화성시|수원시|오산시

[정의]

고려~조선 시대 경기도 화성·수원·오산 지역 일대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동부 일대와 수원시, 오산시 등을 관할한 지방 행정 구역이다. 화성시의 현재 행정 구역 중 조선 시대 수원도호부에 속하였던 곳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안녕동·병점동 등 동지역, 봉담읍·향남읍, 매송면·팔탄면·정남면·양감면 등의 지역이 해당한다. 수원도호부의 읍치는 조선 후기 이전까지 '화성 융릉과 건릉'이 있는 지금의 안녕동 부근이었으나, 정조 대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지금의 수원 지역으로 옮겨 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수원도호부의 전신은 고려 전기 수주(水州)이다. 1271년(원종 12) 몽골군이 대부도에 침입하여 약탈하자, 대부도 사람들이 반발하여 몽골군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수주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반란을 평정하였고, 공을 인정받아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관련 기록]

수원도호부에 관한 내용은 『고려사』지리지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읍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원도호부 설치 계기는 물론 그 이전의 연혁까지 확인할 수 있으며, 관할 범위와 호수, 토성(土姓), 특산물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변천]

수원도호부 지역은 삼국 시대에는 매홀군(買忽郡), 남북국 시대에는 수성군(水城郡) 관할이었다. 이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수성군 사람 200여 명이 귀순하여 오자, 공을 인정받아 940년(태조 23)에 수주로 승격되었다. 인접한 당성군이 고려 시대에 들어와 현격히 위상이 떨어진 것과 달리 수주 지역은 지역적 중요성이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수주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후백제로 향하는 육상 교통로의 길목에 해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995년(성종 14)에는 수주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파견하였는데, 당시 도단련사가 파견된 지역은 절도사가 파견된 12개 주 다음으로 중요시되는 곳이었다. 1018년(현종 9) 지방 제도 개편 때에도 지수주사(知水州事)가 파견되었고, 주변 9개 군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이후 1271년에 수원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얼마 뒤에는 수주목(水州牧)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 목을 폐지할 때 수원부(水原府)가 되었으며,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 침입 때는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일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 지방 제도 정비 때 수원도호부가 되었다.

수원도호부는 조선 시대 동안 몇 차례 읍격의 승강이 있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1793년(정조 17)까지는 도호부 체제를 유지하였다. 수원도호부 체제에 변화가 생긴 것은 조선 후기에 정조가 수원 신도시를 조성하면서부터이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수원 지역 읍치를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이어서 1793년에는 수원도호부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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