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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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買忽郡 |
영어공식명칭 | Maehol-Gun |
이칭/별칭 | 매골,물골,수성,수성군,수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수원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창훈 |
제정 시기/일시 | 5세기 후반 - 매홀군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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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시기/일시 | 757년 - 매홀군에서 수성군으로 개칭 |
관할 지역 | 매홀군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수원시 |
[정의]
삼국 시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과 수원 지역 일대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매홀군(買忽郡)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가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이다. 초기 국가 시대에는 마한의 소국 중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수의 '모'와 매홀의 '매'가 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모수국은 3세기 후반이나 늦어도 4세기 초에 백제에 흡수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매홀군은 고구려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와 수원시 일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5세기 후반에 설치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475년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련 기록]
매홀군이 설치될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고려 시대 이후 지리지류에서 지명 변천 과정을 단편적으로 살필 수는 있다.
먼저,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수성군(水城郡)은 본래 고구려 매홀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수주(水州)이다.”라고 하여 고구려 매홀군-신라 수성군-고려 수주로 이어지는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에 “수주는 본래 고구려 매홀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쳐서 수성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는 본래 고구려 매홀군인데, 신라가 고쳐 수성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삼국사기』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내용]
매홀군의 ‘매’는 물[水]을 의미하며, ‘홀’은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 백제에서는 부리(夫里), 신라에서는 화(火)나 벌(伐) 등의 지명 어미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고구려어가 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대사회에서는 주요한 촌락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행정촌락은 촌락의 이름 뒤에 ‘성’이 붙었고, 그런 의미에서 홀, 부리, 벌 등은 고을의 뜻도 가진다. 따라서 홀은 현대어의 '골'로 이어지는데, 그렇다면 매홀은 물골, 물고을 등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수성, 수주, 수원 등의 지명은 모두 매홀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매홀군의 위치는 정확히 고증하기는 어려우나,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과 수원시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변천]
매홀군은 475년 이후 나제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551년까지 약 80년간 고구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후 551년부터 553년까지 일시적으로 백제에 속하였다가 553년부터 신라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신라가 차지한 이후 매홀군이란 행정 구역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에 의할 때, 757년(경덕왕 16)부터 수성군으로 불렸음은 확실하다.
[의의와 평가]
매홀군의 설치 경위는 비록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5~6세기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한강 유역을 먼저 장악하였던 것은 백제이지만, 고구려의 80년 가까운 통치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강한 영향은 한강 유역에서 백제 지명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고구려의 지명은 신라에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영향으로 인해 신라 기와 등에서 고구려 계통의 명문이 발견되고 있다. 한강 유역에 끼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