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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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信仰의 傳統, 갓등이旺林聖堂, 南陽聖母聖地, 寥塘里聖地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은선 |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남양성모성지의 보존과 영성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 가치.
[도입 – 남양성모성지 선포 과정]
남양성모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 안에서 최초로 성모성지로 선포된 곳이다.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던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순교성지로 1983년부터 개발되었다. 남양은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이 나온 지역이지만, 대부분의 순교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오랫동안 망각되어 있었다. 남양성당의 제3대 박지환 주임 신부는 한종오 베드로를 비롯한 지역 회장들과 현지를 답사하며 구전을 수집하고 사방에 흩어져 있던 관계 문헌들을 모으는 등 장기간의 조사 연구를 통해 남양지역이 순교지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박지환 신부는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순교성지로 조성하고자 1983년 3월에 순교지로 알려진 건넝골에서 처음으로 남양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1984년 1월부터 성지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십자가와 야외제대가 설치되고 성지의 광장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86년 1월 부임한 최덕기 신부는 부임 직후 남양 순교지의 개발 조감도를 세우고 성지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성지 입구 남양천에 임시 다리를 놓는 등 성지를 성역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987년 6월에는 은혜의 성모상을 성지에 세웠다. 매년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인 5월 3일에 남양에서 순교한 김 필립보와 정 필립보 등 남양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남양 본당에서부터 성지까지 순교자 가장행렬을 하며 이동해서 현양 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는 가운데 최덕기 신부는 자신과 선임 박지환 신부의 성모께 대한 영성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14처를 조각하여 성지에서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게 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묵주 기도를 바치게 하고자 돌 묵주알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9년 8월에 부임한 이상각 주임신부는 선임자들의 성모신앙과 자신이 1987년 죽음의 고비에서 성모의 은총으로 살아났던 개인적인 체험까지 작용하면서 남양성지를 순교자성지에서 성모 성지로 바꾸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상각 신부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수원대교구장을 맡고 있던 김수남 주교에게 전했다. 김수남 주교는 성모 성지는 성모가 현양하는 곳에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지로 세워질 수 있다는 교회법을 알려주면서 적극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남양 성지는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동정 성모 축일에 김남수 주교, 이반 디아스 교황 대사가 수원교구와 함께 남양 순교성지를 성모에게 봉헌하고 한국천주교회의 첫 번째 성모 성지로 선포하였다.
[역사교육의 현장 – 박해와 순교]
남양성모성지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에 4명의 외지인들이 끌려와 순교를 당한 곳이다. 용인 출신의 정필립보는 1876년 1월에 교수형을 당하였고, 김필립보와 박마리아 부부와 김흥서 토마스는 1868년 8월 3일에 함께 처형당했다.
남양에서 순교자는 병인박해보다 먼저 1839년에 일어났던 기해박해 때에 생겨났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사람들은 봉담읍 왕림리에 있는 갓등이 공소에서 신앙생활하던 신자들이었다. 이 때 갓등이 공소에서 순교한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가 민극가 스테파노이다. 민극가는 인천 태생으로 서울에서 거주하다 1828-29년경에 갓등이 공소로 내려왔다. 그는 이곳에서 6-7년을 살면서 어린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민극가는 신자들을 교육하고 비신자들에게 전교하였을 뿐만아니라 박해를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수용하였는데, 그 결과 갓등이에 교우촌이 형성되고 공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갓등이공소가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839년 앵베르 주교의 서한이다. 민극가는 갓등이공소에 거주하면서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쳤다. 인근의 양지 은이도 자주 방문하였으며, 최경환 가족이 살던 강원도 김성까지 찾아가 최경환의 아들인 최베드로를 가르쳤다. 또한 관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민극가는 고향인 인천을 계속 왕래하여, 자신을 찾아온 이광현과 이재의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민극가는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0년 1월 30일 5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갓등이 출신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인물로는 정의배 마르코와 최 야고보가 있다. 정의배는 기해박해 때 순교자의 신앙에 감화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정의배는 서울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페레올 주교가 회장으로 임명하여 열심히 활동하다가 1866년 3월 11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72세의 나이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최야고보는 갓등이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해미 삼진이로 이주하였는데 1867년 1월에 해미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포졸들이 고문하며 배교를 하도록 유도했으나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켰다.
남양에서 순교자가 나온 또 하나의 성지가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 있는 요당리 성지이다. ‘느지지’로 불렸던 요당리 성지는 순교자 장주기 성인이 태어나 세례를 받고 주위 친척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그는 박해를 피해 1843년 배론 성지로 이주한 후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봉헌하고,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등 신학생 및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장주기는 병인박해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때 고종이 병을 앓게 된데다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는 이유로 처형장소가 바뀌어, 1866년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회장 등과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
[신앙교우촌(공소)의 형성]
병인박해 때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갓등이공소도 시련을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국내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신부들은 처형되거나 해외로 도피하여 성직자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문호가 개방되자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재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은 예전 교우촌을 재건하여 공소로 지정하고 신자들이 다시 모으는데 힘을 모았으며, 그에 따라 유서 깊은 교우촌이었던 갓등이도 다시 공소로 재건되었다. 1886년‘한불조약’(韓佛條約) 체결로 선교사의 전교 활동이 묵인되고 점차 신자들의 종교 자유가 확보되면서 갓등이 교우촌(공소)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1880년대에 갓등이 뿐만 아니라 남양의 호련이, 백학, 요당리 등지에 다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서 발전과정이 잘 알려진 갓등이 교우촌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81~1882년도에 뮈텔 신부가 남긴 수원지방 교세 통계표에는 고해자 55명, 영성체자 40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수원이 갓등이공소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다음해 경기도 지역 교세 통계표에 갓등이공소의 이름과 교세가 확인된다. 뮈텔 신부와 푸아넬 신부가 이어서 사목 방문했던 1882~1886년도까지 갓등이공소의 신자와 예비자는 1885년도를 정점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여 1886년도 이후에는 2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자와 예비자 수가 늘어난 것은 타지로 피난했다가 되돌아온 박해기의 신자들과 이전부터 정착했던 소수의 비신자들 외에도 타지에서 상당수의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1880년대 들어서 새로 갓등이로 이주해왔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목할 점은 1887~1888년도에 갓등이 지역의 공소가 독정이와 왕림의 두 개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는 하나의 갓등이 공소에 신자 숫자가 193명으로 표기되던 것이 이 해에 독정이 131명과 왕림 62명으로 나누어 표기되고 있다. 왕림 공소에는 주로 농부들이 구성원이었던 반면에, 이 때 처음 보이는 독정이 공소는 ‘독을 굽는 사람(독쟁이)들이 산다’고 하여 ‘독정이 또는 자주‘독쟁이’라고 불렸다는 구전 전승을 근거로 본다면 옹기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까지 하나의 공소를 구성하고 있던 두 개 마을을 나누어 두 개의 공소로 구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88년 수원교구 지역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왕림본당]
갓등이공소가 왕림공소와 독정이공소로 분화하던 1888년에 갓등이공소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하게 된다. 1888년 한강 이남의 서남쪽 지역을 전담할 주임으로 앙드레 신부가 갓등이(왕림)에 부임하면서 갓등이(왕림)본당이 설정되었다. 이후 갓등이 교우촌은 본당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고, 많은 신자들을 효율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자연촌을 단위로 공소가 세분되었다. 갓등이(왕림) 지역에는 3~4개 공소(교우촌)가 병존하면서 18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신자 수가 늘어났다.
1888~1889년도 통계표에는 ‘가마리’라는 새로운 공소(교우촌)가 나타나고, 1890~1891년도 통계표에는 (옹기)점(店) 갓등이가 추가되었다. 먼저 왕림 본당 설정 직후에 나타나는 가마리 공소는 독정이 교우촌에서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가마리라는 지명의 의미에 대해 현재 지명 해설에서는 삼을 많이 재배하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나왔다고 설명하나, 독정이가 옆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독을 굽는 가마에서 가마리가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가마리공소는 독정이공소에서 분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정이공소 신자가 131명이던 것이 공소분화 후에 73명으로 줄어들고 가마리 공소에는 52명의 신자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마리공소가 새로 생겨났다기보다는 독정이공소에 속해 있던 신자들이 가마리공소로 분화한 것으로 보인다.
3개의 공소 이외에 1891년부터는 점(店) 공소가 등장하여 옹기점 갓등이라고 나온다. 점공소는 이름부터 옹기와 관련된 마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점공소가 설정될 때에, 독정이공소와 가마리공소의 인원이 거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이 공소는 외부의 옹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주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서 이주하던 숫자가 점차로 줄어들어 점공소는 1898년에 43명이 있은 후로는 통계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왕림성당이 본당 성당으로 정해진 후에 이 지역의 자연촌들이 독립된 공소로서 발전하여 가장 많을 때는 4개였고, 1899년 이후에는 세 개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1896년에서 1911년까지 15~16년간은 3개 공소에 신자 수가 300~350명 수준에서 유지되다가, 1912년부터 당시 본당 신부였던 르각 신부에 의해 ‘갓등이 공소’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세 통계표상에도 갓등이 공소 이름만 나온다. 1912년 이후 지역 공소들이 통합되어 갓등이 공소가 된 후에도 왕림성당은 본당 성당의 역할과 함께 인근 지역 신앙공동체들의 중심지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종교의 힐링과 치유의 기능]
남양성모성지는 종교 본래의 기능과 함께 지역주민들과 방문객들에게 종교의 힐링과 치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영성문화자원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 현대인들은 빠른 도시화와 현대화 속에서 경기 침체와 저성장, 사회적 갈등과 상처 등으로 심리적인 고통과 아픔을 느끼면서 자연환경과 종교자원의 활용을 통한 힐링과 치유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치유와 힐링의 장소로 종교시설이나 종교자원을 이용하는 사례 또한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 영성이란 용어는 최근의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신체적 건강과 마음 및 정신의 건강을 지향하는 의미의 용어로 종교적 특성보다 개인의 영적인 특성이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성문화관광은 성지관광, 종교관광, 치유관광의 개념을 포함한 보다 넓은 범위의 용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을 하게 되면 종교적 시설 또한 영성관광자원이 될 수 있으며, 종교적 시설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인 힐링, 명상, 치유 및 문화프로그램 등은 영성관광자원으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화성시에 위치한 남양성모성지는 원래 천주교 순례지로서 종교관광객의 방문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곳에 세계적인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건축물인 대성당과 작은 성당(경당), 그리고 평화문화나눔센터의 건립이 진행되고 있다. 대성당은 완공된 후에 개방형 콘서트 홀로 활용되며, 평화문화나눔센터에는 상설 및 기획전시관, 공연장, 도서관, 글로벌 네트워크 방문자센터, 북 카페, 아트숍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개발이 완료되면 음악회, 다문화축제, 사회적 프로그램 운영, 체험콘텐츠 프로그램, 상설전시 및 주제 기획전시 등 다양한 문화 활동 및 치유 프로그램 등이 운영되며, 이는 지역주민과 방문객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것이다. 이러한 영성문화자원이 지역 내 건립됨에 따라 지역관광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뒷받침이 이루어진다면 충분한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 측면에서 영성은 고도화된 문명과 물질적 풍요를 겪은 산업화 이후 그 의미가 변화되었다. 현대인은 사회적인 요구 속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면서 상실되어가는 ‘정직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진정성을 추구하는 여행을 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쾌락적 소비 위주의 여행에서 윤리적 소비로의 여행을 원하는 내면 위주의 여행, 정신수양 여행, 마음 여행, 종교적 여행을 포괄하는 통칭적 의미로의 영성 여행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영성 여행을 만족시키기 위한 영성 관광은 기존의 신과의 관계적 돈독을 위한 종교관광과는 다르게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여행기간 동안의 일시적 정신수양과 치유를 주된 목적으로 진행되며, 정신적 가치와 영성의 재생을 위한 장소적 고유성을 갖춘 지역이면 여행객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가 될 수 있다. 종교적 시설로서 설립되었으나 그 이용적 특성과 장소적 고유성이 존재한다면 지역관광의 활용적 대상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남양성모성지는 영성관광자원으로서의 좋은 조건들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
[결론: 종교시설을 넘어 사회문화적 시설로 활용]
남양성모성지는 훌륭한 영성문화자원으로서 최근 여행 트렌드에 맞게 힐링, 치유 등 관광객이 선호하는 맞춤형 프로그램의 제공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지역의 관광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남양성모성지는 기존의 종교적 의미와 더불어 새로운 건축물들을 통해 사회문화적 시설로의 전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종교시설이 점차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기존의 고유기능만을 담당하던 건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고, 전혀 다른 성질의 공간들이 합하여져 시너지 효과가 발생될 수 있듯이, 남양성모성지는 영성문화자원의 개발과 더불어 지역사회와 연계한 복합화를 통해 시너지 효과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 남양성모성지가 영성문화자원으로 활용되면서 지역관광 활성화가 일어나야 하겠다. 남양성모성지는 종교시설이면서도 토착화된 자애로운 한국 어머니상을 한 성모상과 뛰어난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성당들과 한국인의 통일의 염원을 나눌 수 있는 평화문화나눔센터를 갖추어 사회문화적인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양성모성지의 영성문화자원을 활용한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영성문화자원을 활용한 콘텐츠들의 지속적인 개발이 요청된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이용이 가능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여 지역주민과 방문객이 꾸준히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다양하고 풍성한 콘텐츠가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남양성모성지는 영성 관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곳은 종교적 관점을 초월하여 현대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심리적 안녕, 힐링, 치유 등 다양한 목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장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 기존의 종교관광에 기반한 목적지에서 탈피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그 안에서 휴식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목적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