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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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室 王室-安息處, 王陵-隆健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안녕동 187-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릉과 건릉으로 살펴본 조선 후기 왕실 효행.
[개설]
조선의 왕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은 세계적 유산이다. 1392년 태조는 즉위와 함께 4대조의 묘소를 왕릉으로 추숭하였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그 외의 무덤은 묘라고 하였다. 조선 왕조는 고려 공민왕릉의 제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명나라 능묘 제도를 받아들여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 구성과 석물 상설 제도를 만들어내었다. 조선 왕릉을 조성하는 절차와 각종 의식, 배설 석물 등에 관한 예제적인 정비는 『세종실록』 오례의를 거쳐 성종 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 단계에서 일단락되었다. 성종 대 이후 왕릉은 『국조오례의』를 기본으로 하되,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왕릉 조성의 전례, 새로운 왕릉이 자리하게 될 장소 주변에 있는 왕릉의 제도까지 참조하여 조성되었다. 이러한 조선 왕릉 중에서도 '화성 융릉과 건릉'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 구성을 하고 있다.
[화성 융릉과 건릉 : 아버지와 아들의 특별한 공간]
융릉은 사도세자, 건릉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무덤인데, 두 능이 지금의 위치에 조성된 과정부터 평범하지는 않다. 사도세자가 1762년(영조 38) 사망하자,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고, 1789년(정조 13)에는 수원부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읍치가 있던 자리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천장하였다. 새로 조성한 무덤의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이었다. 왕실 능침의 조성을 위해 행정 소재지인 읍치까지 이전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후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정조 및 효의왕후 김씨의 능침까지 현륭원 인근에 조성되면서 능역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현륭원에서 융릉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융릉과 건릉은 단순한 부자지간의 능침을 넘어, 아들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극한 효심을 발휘하며 조성한 공간이다. 후대 왕이 선대왕의 치적을 높이기 위해 특별한 능침을 조성하는 경우는 있으나, 정조와 같이 생부인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해 기획적으로 지역을 선정하여 묘소를 세운 뒤 본인의 능침까지 지근 거리에 두도록 한 사례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융릉과 건릉은 부부 합장 능으로, 사후에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효를 행하는 듯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를 사후에도 지속한다는 정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렇듯 화성 융릉과 건릉은 왕실 가족의 비극적이면서도 서사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왕릉들이다. 이러한 특별한 이야기는 현재에도 화성 지역이 효행의 공간으로 강조되고 문화 행사를 지속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천장 :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옮겨 높이다.]
현륭원은 천장 의례에 따라 조성하였으며, 천장 과정에서 왕릉급 규모를 구비하게 되었다. 천장을 통해 현륭원으로 묘소를 옮긴 과정은 『궁원의』로 정리되었다. 사도세자의 묘소와 사당의 건립 과정 및 정조가 즉위 후 화성에 현륭원을 조성한 절차가 연대기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천장은 기존 묘소의 풍수 혹은 지리적 문제로 진행되는 이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왕릉의 이전은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륭원을 도성 인근이 아닌 삼남으로 통하는 길목인 화성 지역에 조성한 것부터가 세종의 여주 지역 안장과 마찬가지로 대외적 이목을 받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천장 과정을 종묘의 의례에 준하는 것으로 한 것에서도 정조의 정치적 의도가 잘 드러나는데, 화성의 공간적 기능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행 : 효를 실천하여 모범이 되다.]
정조가 1789년 윤2월에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참배하면서 비통한 마음으로 통곡을 하는 장면은 화성 능행이 왕실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합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정조 이후 융릉과 건릉에서는 매년 정기적인 국왕의 행차인 능행이 이루어졌고, 능행과 함께 능침에서의 각종 제례 및 알현 의례가 거행되었다.
또한 화성 능행차가 정착되면서 국왕 일행이 지나가는 연변의 도로 및 교량, 민가 등의 건축 시설이 증대 및 확장되어 도회지화가 촉진되었다. 원행의 동선은 창덕궁 돈화문→종루 앞길→광통석교(廣通石橋)→송현(松峴)→숭례문→한강 배다리→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시흥행궁→화성행궁→팔달문→매교(梅橋)→상류천(上柳川)→하류천(下柳川)→황교(皇橋)→옹봉(甕峯)→대황교(大皇橋)→유첨현(逌瞻峴)→안녕리(安寧里)→유근교(逌覲橋)→만년제(萬年堤)→현륭원으로 이어졌다. 능행 시 화성 지역은 공휴일이었으며, 국왕과 관민이 길에서 만나 회합하는 날이었다. 「화성원행도」에는 국왕의 행차를 보러 온 남녀노소의 군중들이 연변의 임시 주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맞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고 자유롭게 국왕을 대하면서 민원을 올리기도 하였다. 화성 능행은 국왕과 인민의 대화의 장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정조 이후의 화성 능행은 순종 대까지 국왕과 황제들의 의례적 의무이면서 왕실 가족의 화목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정치를 하는 것은 공명정대한 왕조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부자간의 영원한 안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왕실 가족의 전형(典型)을 만나는 일이다. 왕실의 모범이 되는 가족의 회합, 왕조의 근본인 효를 실천한 국왕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후대 국왕들의 능행이었다.
능행은 대한제국 시기 순종 대에도 왕실의 효라는 유산으로 계승되었다. 순종 대 능행은 선대와 달리 기차를 이용하였으므로, 당일 환궁이 가능한 일정으로 화성 행차를 거행하였다. 예컨대 6시 50분에 돈화문에서 출어하여 남대문 정거장에서 7시 30분에 기차를 타고 8시 45분에 대황교(大皇橋) 임시 정거장에 도착하여 융릉과 건릉에 친제를 지낸 뒤, 오후 7시 이전에 환궁하는 일정이었다. 순종의 행차가 지나는 기차역과 철도 연변에는 전대와 동일하게 화성 지역민들이 환영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효행의 상징 : 화성 융릉과 건릉의 현재적 의미]
화성 융릉과 건릉에는 왕릉의 기본 구조물인 정자각과 묘표 등의 석물이 정비되어 있다. 석조물은 인근의 앵봉(鸎峯)에서 채취한 석재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비각에는 2기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1기는 현륭원이 융릉으로 격상되기 전의 표석이며, 또 다른 1기는 융릉으로 격상된 이후의 표석이다. 현륭원 시절 비석에는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莊獻世子 顯隆園)'이라고 새겨져 있다. 융릉 비석에는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제작 연도는 1900년이다. 조선 왕릉이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화성 융릉과 건릉은 일제 강점기에도 이왕직의 관리하에 제사와 봉심(奉審)이 지속되었다. 화성 행궁이 훼손되었으나 홍살문과 부속 건물에 대한 수리가 진행되었으며, 참배와 제례도 전근대의 왕실 문화를 계승하는 모습이었다. 영친왕은 창덕궁에서 자동차로 행차하여 전알하였다. 또 정조의 효행을 기리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는 능역에 출입하는 일반인들의 풍기를 단속하였고, 6·25전쟁 때는 왕가의 영역이라는 영어 표지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화성 융릉과 건릉은 조선 왕릉이 지니는 왕조의 영속성과 정통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다. 또 정조가 생전에 부친에게 다하지 못한 사정(私情)을 사후에 동일한 능침 공간에서 어머니와 부인을 동반하여 나누는 왕실의 안식처 기능을 다하고 있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왕릉이 정치적 상징성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사적인 가족사를 배경으로 조성되어 효행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화성 융릉과 건릉만이 가지는 고유성이다. 화성시가 효를 지향하는 효행의 도시가 된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