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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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城-統一新羅人- |
영어공식명칭 | Life and Death of People of Unified Silla on Hwa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성남 |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청계리 유적과 안녕동 유적 등으로 살펴보는 통일 신라기 사람들의 삶.
[개설]
'현재의 화성시 동탄2신도시와 서부우회도로, 1300년 전 신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지역은 553년(진흥왕 14)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전초 기지로 삼았으며, 통일 이후에는 한산주(漢山州)를 두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의 행정 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는데, 한산주는 9주 중 하나였다. 한산주는 소경 하나와 27개 군, 46개 현을 관장하였는데, 화성 지역에는 매홀군(買忽郡)과 당성군(唐城郡)이 있었다. 757년(경덕왕 16), 경덕왕은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개칭하였고, 매홀군과 당성군은 각각 수성군(水城郡)과 당은군(唐恩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816년(헌덕왕 8)에는 당은군이 아닌 당은현(唐恩縣)이라 표기한 기록도 보이며, 823년(헌덕왕 15)에는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하였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후 829년(흥덕왕 4)에는 당은군을 다시 분리하여 당성진(唐城鎭)으로 만들었다.
당성군은 지금의 화성시 남양읍 일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수성군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나 화성시 봉담읍 일대로 보고 있다. 현재의 행정 구역에 옛 지명이 남아 있는 예는 많이 있으나, 고대 행정 구역의 영역이 지금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에, 현재 화성시 내에서 조사된 유적 중 청계리 유적과 안녕동 유적을 중심으로 통일 신라기 화성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통일 신라기 화성 사람이 남긴 흔적들]
현대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옥, 즉 주거의 형태가 주택, 아파트, 빌라 등으로 다양하지만, 고대에는 지금보다 조금은 한정적인 재료와 형태로 집을 짓고 살았다. 그렇다면 통일 신라기 화성 사람들은 어떤 가옥을 짓고 생활하였을까. 당시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문화재 조사, 즉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움집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취락 조사가 증가하고 있어, 고대 가옥과 취락의 면모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움집자리란 땅을 파낸 반지하식 구조에 기둥을 세워 벽과 지붕을 올린 움집 구조의 집터를 말한다. 오늘날 민속촌에 가서 볼 수 있는 온돌이 들어오는 집이 통일 신라기에도 있었을 텐데, 움집이라고 하면 조금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중심지는 경주였으며, 다른 지방은 거점이 되는 중요 건물 이외에는 대부분 사람이 땅을 파고 집을 지었다.
그러면 이하에서 통일 신라기 화성 지역의 주거 형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현재 화성시 동탄2신도시라고 불리는 곳에는 신도시 개발에 앞서 발굴 조사를 시행한 청계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청계리 유적은 면적이 넓은 관계로 가지구~마지구로 구분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전체 지구에서 통일 신라기 집자리 및 고상식 가옥, 수혈, 우물 외 다수의 생활 관련 유구가 조사되었다. 특히 나지구 A지점 2구역에는 단위 취락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통일 신라기 화성 사람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집자리는 모두 움집 형태인데, 대체로 남향하는 능선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입구는 동남향·남향·서남향 등으로 나타난다. 북서풍을 차단하고 풍부한 일조량을 받기 위한 입지 선택으로, 경기도 남부 지역 구릉지에 위치하는 신라 취락에서 거의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한편, 서부우회도로 화성시 구간 내에 자리한 안녕동 유적에서도 통일 신라기 집자리 및 고상식 가옥, 우물, 경작지 등이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남동쪽 사면 하단부와 북서쪽 사면 상부 일대에서 조사되었는데, 청계리 유적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요소를 고려한 입지로 여겨진다. 당시 취락의 형성에 자연환경의 영향이 크게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화덕 자리 혹은 난방을 한 흔적들이 집자리에서 조사되었다. 청계리 유적, 안녕동 유적, 수영리 유적 등에서 구들 혹은 아궁이 등을 갖춘 난방 시설이 주거 내부 시설로 확인된다. 아궁이로 추정할 수 있는 소결흔[장시간 불에 맞은 흔적] 등만 남아 있어 정확한 구조 파악이 어려운 예도 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아궁이의 바닥이 집자리 바닥보다 낮게 조성되어 있고, 일부 아궁이와 접한 벽면이 소결되어 있거나, 아궁이와 바로 붙어 연통부 흔적이 확인되는 등 화덕 형태의 난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것은 분명하다.
이외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물을 얻는 시설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우물은 청계리 유적 나지구 A지점 2구역 취락에서 총 4기, 안녕동 유적에서 1기가 조사되었다. 안녕동 유적은 가옥의 바로 옆에 우물이 있고, 청계리 유적의 경우는 능선 하단부의 평탄 지대에 있는데, 지형적으로 물이 모이는 곳에 우물을 마련하였다. 조사 당시에도 하부에서 용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형태는 원형이며, 지상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연질의 시루, 완, 대부 완, 개, 고배, 동이, 토제 그물추, 기와, 철기 등 다양한 기종이 수습되었는데, 집자리 유적들에서 나온 토기는 시기 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에 있는 성복동 통일 신라 가마터 출토품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로 보아 8세기 중후반에서 9세기 초에 집자리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과 가옥의 크기는 어떠하였을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집의 면적을 얘기할 때 ㎡로 표시하며, 평면도로 집 구조를 파악한다. 예전에도 집은 가족의 구성원에 맞게 일정한 면적 안에서 짓고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나누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발굴 조사된 집자리에서도 확인되며, 조사 시에 구조를 실측하여 도면으로 남겨 파악하기도 한다. 오늘날처럼 내부에 거실과 방문과 부엌 등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난방 겸 취사를 할 수 있는 부엌, 일반 생활을 하거나 어떤 도구를 만들기 위한 공간, 식자재 등을 보관하는 공간 등 어느 정도 공간을 나누어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취락 내에서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간과 주거 공간, 저장 공간 등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청계리 유적 나지구 A지점 2구역과 라지구 C지점+마지구 G지점은 단위 취락을 형성하고 있는데, 나지구 A지점 1구역은 토기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 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 사이에 위계질서가 보이지는 않으며, 지형을 고려하여 주거에 적합한 곳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다양하나, 직사각형 형태가 다수를 차지한다. 생활 공간의 규모를 확인해 보면, 소형의 사각형 집자리는 9.9~11.4㎡이다. 직사각형 집자리의 생활 공간은 11.1~13.8㎡이고, 긴 타원형 집자리는 14.7㎡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최소 추정치이며, 원 생활 면적은 더 넓을 수 있다고 조사단은 밝히고 있다.
수영리 유적의 집자리도 직사각형 혹은 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규모는 대체로 10㎡로 소형에 속한다. 안녕동 유적의 집자리 평면 형태는 사각형,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직사각형 등 다양하며, 등고선 방향과 나란한 편이다. 규모는 크지 않으며, 내부 면적은 8~12㎡이다. 이렇듯 대부분 네모난 형태의 움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간혹 큰 가옥도 있으나, 대부분은 소단위의 가족이 중심이 되어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의 집자리와 취락에 살았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청계리 유적 보고서에서는 1인당 생활 공간의 면적을 집자리의 최소 면적과 비교하여 대략적인 거주 인원을 추정하였다. 1인당 생활 공간을 3㎡로 계산하여 소형의 사각형 집자리는 3~4인, 중형의 직사각형 집자리는 4~5인, 대형의 긴 타원형 집자리는 5인 이상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직사각형 집자리가 76%를 차지할 정도로 대다수임을 고려하여, 1가구당 평균 거주 인원은 4~5명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계산에 따라, 나지구 A지점 2구역 취락의 인구수를 76~95명 정도, 일부 파괴된 지형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자리까지 고려한 추정치를 100~125명으로 산정하였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단위 취락으로,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 농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생각된다.
[식자재 보관과 식량 생산]
사람의 생활에는 크고 작은 적지 않은 물품이 필요하다. 또, 각종 도구와 물건 등을 만드는 공간도 필요할 것이다. 청계리 유적에서는 생활과 관련된 물건을 제작하는 생산 유적도 확인되었는데, 가마와 공방 터 등이다. 가마는 조사 지역의 남동쪽 구릉 사면에서 확인되었는데, 모두 등고선과 직교한다. 1호와 2호는 반지하식의 등요, 3호는 지하식의 평요이다. 1호 가마 소성부 바닥에는 여러 번 점토를 덧발라 보수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외에 작업장으로 추정되는 수혈 및 고상식 가옥 등이 조사되었다. 내부에 소결흔 등이 확인되며, 주변으로 배수를 위한 시설 등도 있었다. 여기서 어떠한 물품을 생산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사단은 27호 수혈에서 주조 철부 편이 출토되고 생활 용기가 확인되지 않는 점, 소결흔 등이 조사되어 일반적인 가옥과는 다르다는 점 등을 들어 농기구를 수리하는 등의 작업장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또, 식자재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취락 내에 저장 시설을 마련하였다. 저장 시설의 형태는 소형의 수혈과 대형의 고상식 가옥이 있다. 수혈은 대체로 집자리 인근의 풍화 암반 지대에 조성하였으며, 형태는 직사각형과 원형을 기본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규모는 2~5㎡로 비교적 소형이다. 수혈은 땅 밑으로 구덩이를 파고 식료품 등을 보관하던 ‘움 저장고’라고 보면 된다.
고상식 가옥의 형태는 직사각형과 사각형이 있으며, 규모는 대체로 10㎡ 내외, 가장 넓은 것은 28.2㎡이다. 수혈에 비하면 대형이다. 고상식 가옥의 구조는 오늘날의 필로티 건물을 생각하면 된다. 1층은 비워두고 기둥을 세워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오르내릴 수 있다. 이렇게 지상에서 거리를 두면 통풍에 유리하고, 해충으로부터 음식 재료를 보호하기 쉬웠을 것이다. 대형의 저장 시설은 마을 공동 시설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청계리 유적, 안녕동 유적 모두에서 나타난다.
한편, 안녕동 유적에서는 경작 유구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조사 지역 남쪽으로 내려오는 구릉 하단부 일대에 사면을 따라 11개의 경작 면이 계단상으로 조성되었다. 내부 조사에서 논둑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수로를 기준으로 구획을 나눌 수 있다. 방향은 모두 등고선과 나란하며, 지형을 따라 경작 면을 나누었다. 이외에도 수로와 이어지는 취·배수구 등의 관개 시설이 확인되었다. 유적의 주변으로 안녕천이 흐르고 있어 논농사를 짓기에 유리한 지형 조건이다.
주목할 점은 경작 면 내에서 사람 발자국과 소 발자국이 다수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발자국은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으며, 일부 수로에서는 일렬로 배치된 발자국이 남아 있어 논의 경계 부분을 통해 이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소 발자국은 일정한 폭을 유지하며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분적으로 농기구로 땅을 경작한 흔적이 확인되어 소를 이용한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하단부 경작 면에서는 폭 2m 내외의 수레바퀴 자국 등이 남아 있어 수레 또는 마차와 같은 운송 수단이 동원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논 경작지가 계단상으로 조성된 것은 앞선 시기에 비해 발전된 형태이며, 소 발자국과 쟁기 흔적은 우경의 보급과 연결 지을 수 있다. 438년(눌지마립간 22) 4월 “백성들에게 소가 끄는 수레의 사용법[牛車之法]을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소를 이용한 경작이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경이 보편적으로 보급된 시점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통일 신라기 화성 사람들의 일상]
청계리 유적에서 보았듯이 통일 신라기에는 구릉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가옥은 능선 중턱에 동남향·남향·서남향 등으로 배치하여 북서풍을 피하고 일조량을 풍부하게 받게 하였고, 내부에는 난방 시설을 갖추어 추운 겨울을 견뎠다. 집 주변에는 개인 혹은 몇몇 가옥이 모여 지하에 움 저장고를 만들고 식자재를 보관하였다. 경사면에서 평탄지로 연결되는 지점에는 생활 용기 등을 생산하는 가마, 다른 물품 등을 만들거나 수리를 할 수 있는 작업장을 배치하여 두었다.
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 요소인 물을 얻기 위해 능선 하단부 평탄 지대에 우물을 조성하여 식수와 생활용수를 얻었다. 우물이 가옥 근처에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구릉의 특성상 물을 얻기 쉬운 위치 곳곳에 만들어 집자리별로 가까운 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물은 30~50m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성하였으며, 우물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위를 감싸는 지붕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습기를 방지하고 원활한 통풍을 위해 마을 하단부 공동생활 공간에 조금 더 큰 규모의 고상식 가옥을 지었다. 대형 저장 창고를 하단부에 조성한 것은 평탄지에 있었을 경작지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바로 보관하거나, 경작에 쓸 여러 물품 혹은 종자를 저장하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이 중심이었을 당시 사회 사람들의 동선을 고려한 시설물 배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7세기 후반 이후 통일 신라기 고분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이 현재 화성 지역에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주변 유적이나 같은 지역에 분포하는 앞선 시기 분묘로 보아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을 만들어 내부에 부장품을 넣고 장례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기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묘(火葬墓)가 새롭게 출현하고 부장품 또한 검소하게 바뀌게 되는데, 이에 따라 장례 풍습이 조금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백곡리 유적의 서쪽 정상부 건물터는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으나, 내부에서 불두(佛頭) 편이 출토되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 대부분은 통일 신라기로 보이며, 함께 수습된 토기 편은 7세기 중엽 이후부터 9세기 전반의 것들이다.
이렇듯 통일 신라기 전반에 걸쳐 화성 지역에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 시기에 한해 확인되지 않는 유적도 있는데, 앞으로 관련 유적의 조사 성과가 축적되어 보다 더 뚜렷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