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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10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진규

[정의]

유적과 유물을 바탕으로 살펴본 백제 시대 화성 지역 문화와 위상.

[개설]

경기도의 남서쪽에 있는 화성시는 서쪽으로는 서해안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내륙의 동탄 지역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다. 지형은 대체로 동북쪽이 산세가 높으며, 중앙 지역과 서해안 쪽 일대는 저산성 구릉 지대가 광범위하게 발달하였다. 또한 발안천, 황구지천, 오산천, 자안천 등 여러 수계가 발달하여 있는데, 고대 화성 지역에는 이러한 수계와 저산성 구릉지를 중심으로 다수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삼국 시대 초기 화성 지역은 마한의 영역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54개국 중 상외국(爽外國)·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 등 3개국이 화성 지역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상외국은 화성시 남서쪽 서해안 지역인 우정읍·장안면 일대, 원양국은 화성시 중부 지역인 남양읍비봉면 일대, 모수국은 수원시에 인접한 화성시 동쪽 지역으로 비정된다.

화성 지역은 마하리 고분군 출토 유물이나 요리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금동 신발 등으로 볼 때, 4세기경에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의 마을]

화성 지역에서는 향남읍 발안리에서 59동, 옛 동탄면 청계리에서 117동, 고금산에서 60동, 감배산에서 3동 등 다수의 초기 국가 시대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 여(呂)·철(凸)자형 등이 있다. (장)방형 집자리는 집자리 모서리에서 4개의 기둥 자리가 확인되는 것이 특징으로, ‘사주식주거(四柱式住居)’로도 불린다. 여·철자형 집자리는 출입구가 대부분 남쪽 방향으로 돌출된 것이 특징으로, 강원도 춘천시 중도에서 처음 조사되어 ‘중도식 주거지’라고도 불린다.

초기 국가 시대 집자리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장)방형 집자리는 마한이 있던 지역인 경기도·충청도·호남의 서해안에서 발견되고, 여·철자형 집자리는 경기도·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두 집자리의 분포권이 다른 것은 마한계[장방형 집자리]와 예계[여·철자형 집자리] 문화의 분포권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던 서울특별시 강남 지역의 경우 여·철자형 집자리가 확인되고 있어 예계 문화의 영향을, 화성 지역은 (장)방형 집자리가 주를 이루고 있어 마한계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화성 지역이 초기 국가 시대부터 백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성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집자리 평면 형태로 보아 고유의 주거 문화를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시대 마을은 석우리 먹실·왕림리·마하리·노리재골·화산동·반월리 속반달이·남양동·금곡리·요리·장외리·운평리·소근산성·천천리 등의 유적에서 조사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마을 전체가 조사된 것이 아니라서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백제 시대 마을 유적 중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오산천 상류에 자리한 석우리 먹실 유적을 들 수 있다. 총 19동의 집자리와 146기의 저장 수혈, 14기의 지상식 건물터가 발견되었으며, 경작지와 도로 등도 조사되어 마을의 형태를 온전하게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을은 구릉 하단에 호상(弧狀)으로 배치되었으며, 구릉 상부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수혈이 다수 조성되어 있다.

출토 유물은 검은 간 토기, 삼족기, 고배, 기대, 삼족 호 등 주로 백제 중심 지역 고분이나 지방 유력자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들로, 백제의 고급 기종에 해당한다. 석우리 먹실 유적에서 이러한 토기들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백제의 지방 지배 방식과도 관련 있다. 즉, 경안천을 중심으로 백제 중앙의 집자리 형태인 여·철자형 집자리가 발견되는 데 비해, 경안천 서쪽에 있는 오산천 등에서는 마한계 집자리인 (장)방형 집자리가 주로 들어서 있다. 백제는 경안천을 따라 경기도 남쪽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오산천 등은 주요 진출로 외곽에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은 마한 소국들이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지역으로, 백제 중앙 정부는 직접 지배 대신 간접적인 지배 방식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급 백제 토기가 먹실마을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의 인구는 3세기경에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체로 춘천·연천·원주·김포·광주·화성 등의 지역에 큰 마을이 들어선다. 이어 4세기경이 되면 경기도 남부 지역인 화성 지역을 중심으로 큰 규모의 마을이 들어서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 내에서도 지방 세력의 재편과 맞물려 구세력이 몰락하고 화성 지역의 신규 마을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 있다. 또한, 철기의 생산, 경작지의 증대와 함께 전반적인 식량 생산 능력이 확대되면서 인구 부양 능력이 증대되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화성의 고분]

화성 지역에서 가장 많이 조사된 유적은 마을 유적이지만, 중요 유물은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백제 시대 고분에서는 당시 고분을 조성한 집단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화성 지역의 백제 시대 고분으로는 1930년대에 지표에서 다양한 부장품이 발견된 사창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백곡리 고분군, 마하리 고분군, 화산 고분군 등이 있다. 최근에는 봉담읍 왕림리 노리재골에서도 큰 규모의 돌방무덤이 확인되었다.

마하리 고분군은 화성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 유적으로, 널무덤 15기, 덧널무덤 1기, 독무덤 1기, 돌덧널무덤 49기, 돌방무덤 1기 등 총 6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마하리 고분의 특징은 무덤의 측벽에 유물을 넣는 부장 공간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백제 고분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으로, 마하리 지역 집단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하리 고분군은 널무덤→덧널무덤 →돌덧널무덤→돌방무덤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출토 유물에서도 특징이 있는데, 주로 지방에서 제작된 토기만 출토되었다. 따라서 한성 백제 중앙 정부와의 관련성이 타 지역 고분들보다 떨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지방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오랜 기간 동안 세력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요리 고분군의 1호 덧널무덤에서는 화성 지역 최고 위계로 추정되는 금동관, 금동 신발, 금제 귀고리 등 금동 제품과 고리자루큰칼 등 철제 무구류가 출토되었다. 금동관과 금동 신발은 백제 중앙에서 지방에 내린 하사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동관은 요리 1호를 포함하여, 충청남도 천안시 용원리 9호분, 충청남도 공주시 수촌리 1·4호분, 충청남도 서산시 부장리 5호 분구묘, 전라북도 익산시 입점리 86-1호분, 전라남도 고흥군 길두리 안동 고분, 전라남도 나주시 신촌리 9호분 을관 등 전국 8곳에서만 출토되었다. 8점 중 신촌리를 제외한 7점은 한성 백제기 금동관으로 보고 있다.

요리 고분군 보고자는 금동 신발의 형태가 공주시 수촌리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점을 고려하여 5세기 1/4분기로 편년하고 있다. 요리 1호분에서 확인된 금동관의 경우도 최근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른 시기 형태로 보이며, 5세기 1/4분기로 편년하고 있다. 따라서 요리 1호분의 편년은 5세기 초엽이나 전엽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창리 고분군에서는 중국 진(晉)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과대[벨트]가 확인되었다. 과대는 복식의 일부로 사창리 고분의 피장자에게 하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금동관과 진식 과대 등은 모두 중앙에서 내려온 하사품으로, 지역에 대한 간접적인 통치를 위해 전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요리 고분군사창리 고분군 모두 길성리 토성에 근접하여 있는데, 길성리 토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4~5세기 대 화성 지역 일대에서 정치적 중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의 성곽]

백제시대 화성 지역에서는 길성리 토성·운평리 토성·소근산성·모락산성·청명산성 등이 축조되었다. 이들 산성은 축조 시기에 차이가 있는데, 길성리 토성과 운평리 토성은 4세기 전반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다른 산성들은 4세기 후반~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길성리 토성과 운평리 토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길성리 토성은 기본적으로 성토 기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지만, 삭토법, 보축 등 마한 이래의 재지 축성 기법이 적용되었다. 길성리 토성의 규모와 축성 기법,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백제가 한강 이남 지역에서 재지 세력을 이용하여 대규모로 축조한 최초의 성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는 교통로상의 이점, 기안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제철 기술, 그리고 식량 생산 능력 등이 우수하였던 화성 지역을 마한 지역 진출에 있어 가장 먼저 거점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운평리 토성은 길성리 토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화성 내륙 지역과 서해안을 이어주는 물류 교통망 및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4세기 후반~5세기경에 이르면 소근산성·모락산성·청명산성 등이 축조된다. 소근산성은 판축 기법과 성토 기법이 혼용된 성으로,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축조되었다. 길성리 토성이 주변에 있음에도 아직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 곳을 장악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소근산성이 축조되면서 안성천·진위천 이북의 경기도 남부 지역이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모락산성과 청명산성은 판축 기법과 함께 성토 기법이 혼용된 성으로, 소근산성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축성법이 적용되었다. 모락산성은 한성에서 모락산성, 그리고 길성리 토성·소근산성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의 요지에 자리한다. 이러한 위치의 이점으로 인해 지방 지배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청명산성은 화성 서북부 내륙 지역에서 서해안으로 연결되는 수운 교통의 관문으로, 물류 안전망을 관리하기 위해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시대 화성의 위상]

위에서 마을, 고분, 성곽 등을 통해서 백제 시대 화성 지역의 문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초기 국가 시대부터 화성 지역에 마을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나, 중심적인 지방 세력 중 하나로 성장한 시기는 4~5세기 대로 추정된다. 백제 시대 화성 지역은 식량 생산이 증대되었고, 기안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중부권 최대의 철 제품 생산지였다. 다수의 마을 유적은 화성 지역이 백제의 지방 중에서도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 중앙 정부는 인구, 식량, 철 등 주요 자원을 고루 갖춘 화성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 증거로 요리 고분군이나 사창리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 복식 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이러한 고급 위세품을 지역의 수장급 인사에게 하사함으로써 화성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길성리 토성, 소근산성 등 지방의 치소에 해당하는 성들은 화성 지역이 정치, 교통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증명한다.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

화성 지역 삼국 시대 고분 문화의 특징은 중요 유물이 출토되는 고분 유적이 많다는 점이다. 백제 시대 고분인 사창리 고분군이나 백곡리 고분군, 화산 고분군 등은 발굴 조사가 극히 일부만 진행되었거나 지표에서 유물을 수습한 정도이지만, 진식 과대나 금제 귀고리, 갑주, 마구류가 다수 확인되어 비교적 높은 위계의 고분임을 보여준다. 이들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더 진행되면, 요리 고분군과 같은 최고 위계의 유물이 출토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요리 고분군사창리 고분군은 길성리 토성과 근접 거리에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길성리 토성은 한성 백제가 성곽을 축조하기 시작하였을 시기에 지어진 토성이다. 풍납토성보다는 작지만 몽촌토성보다 규모가 더 크며, 평산성으로 접근성도 좋다. 현재 지표 조사만 진행된 상태로 명확한 현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추후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외성, 내성 그리고 내성에 있는 건물터까지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면, 당성과 마찬가지로 좋은 관광 자원으로 활용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전술한 주변의 사창리 고분군, 요리 고분군을 발굴 조사하여 연계하면 더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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