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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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合-革新 : 華城 地域-先史 時代 文化 資源-通-未來 價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 |
집필자 | 이후석 |
[정의]
구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 통합과 교류를 지향하며 첨단 기술을 발전시킨 화성 지역 선사인의 삶.
[화성 지역 최초 사람들과 선사 문화]
화성 지역은 서해안과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관문이며, 해양 자원과 내륙 자원을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화성 지역 선사 문화는 이와 같은 환경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주변 지역과 교류하여 보편적인 문화를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화성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 유적들로 보아 약 30만 년 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유적들은 주로 해안이나 하천 변 구릉 지대를 중심으로 확인되며, 이때부터 정착 생활을 시작한다. 청동기 시대를 기점으로 유적 수가 급증하며, 이로 보아 인구 역시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은 구릉 위에 입지하는 마을 유적인데, 제의 공간으로 추정되는 환호[도랑] 시설 등이 확인되는 농경 마을이며, 사냥이나 고기잡이 등을 겸하였다. 무덤 유적으로는 고인돌과 움무덤이 확인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부터는 최첨단의 금속 제작 기술과 장인 집단을 보유하고 정치체를 형성하였다.
2022년 현재, 화성 지역에서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선사 유적은 약 30여 개소인데, 역동적이었던 화성 지역 선사인의 삶을 반영한다. 학술적인 가치가 큰 유적들을 중심으로 화성 지역 선사 문화의 흐름과 변동을 시대별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삶과 신앙의 단면을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최초 사람들이 머문 흔적 : 오산리-청계리 구석기 시대 유적]
화성 지역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은 오산리 유적과 청계리 유적이다. 두 유적은 서로 인접하고 있어 크게 보면 단일 유적군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유적에서 집자리나 야외 화덕 같은 거주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뗀석기가 다량 출토되는 퇴적층이 확인되어 늦어도 이때부터는 화성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유적에서 확인되는 뗀석기는 약 1만 점이지만, 실질적인 도구 석기는 최대 10% 미만이다. 하부 유물 포함층에서는 주로 몸돌이나 주먹 도끼 또는 주먹 찌르개 등의 규암으로 만든 대형 석기들이 확인되며, 대략 6~4만 년 전에 해당한다. 상부 유물 포함층에서는 긁개와 홈날, 톱니날, 찌르개, 뚜르개 등의 석영으로 만든 소형 석기들이 다수 확인되며, 혈암제의 소형 석기도 일부 확인된다. 3만~2만 년 전에 해당하며, 석기 다양성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오산리와 청계리로 대표되는 화성 지역 일대 구석기 시대 유적은 대부분이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로 대표되는 후기 구석기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변화에 적응하여 정착 생활을 시작하다 : 석교리 신석기 시대 유적]
화성 지역 신석기 시대는 서해안의 기후 환경이 안정되고 갯벌이 형성되는 기원전 5천 년경 이후에 개시된다. 화성 지역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들이 대개 신석기 시대 중후기에 해당하는 주거 유적이거나 조개더미 유적인 것은 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주거 유적의 집자리는 보통 1~2기에 불과한데, 석교리 유적에서는 남북으로 연결되는 구릉 능선 두 지점에서 집자리 26기와 야외 화덕 자리 1기가 확인되었다. 다수의 집자리가 확인되어 화성 지역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마을 유적으로 평가된다.
석교리 유적 집자리는 해발 20~34m의 북쪽 능선 한 지점과 남쪽 능선 두 지점에 밀집되어 있어 3개의 주거군이 설정된다. 각 주거군의 내부 집자리는 거의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는데, 북쪽 능선 주거군에서는 11기, 남쪽 능선 주거군에서는 각각 9기와 6기가 확인된다. 또한 남쪽 능선 두 주거군 사이에는 광장으로 추정되는 공터도 확인된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 혹은 말각 방형이다. 집자리의 길이는 대개 300~400㎝이며, 큰 것[18호]은 550㎝ 내외이다. 집자리 바닥 중앙 부근에는 화덕 자리가 확인되며, 모서리에서 기둥 구멍이 확인되는 예가 많다.
출토 유물은 토기류가 많고 석기류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빗살무늬 토기 편이 500여 점이나 출토되었는데, 1~2종의 빗살무늬를 새긴 것이 많다. 석기류는 40여 점이 확인되었는데, 갈판과 갈돌로 대표되는 식량 가공구가 20여 점이다.
화성 지역 다른 유적과 달리 출토 토기에서 상하 다른 문양으로 구성되는 빗살무늬가 확인되는 한편, 바닥에는 기본적으로 문양이 없는 것이 많아 신석기 시대 중기 단계 유적으로 판단되고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를 고려하면 기원전 3,600년~3,000년경으로 추정된다. 한랭 건조화된 기후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잡곡 농경의 비중을 늘리거나 집단의 규모를 작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생계 전략을 바꾼 결과 석교리와 같은 마을 유적이 탄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집단 제의를 통해 마을들을 통합하다 : 쌍송리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과 병점동 고인돌]
화성 지역은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 한랭 건조화된 기후 환경이 안정됨에 따라 생산력이 향상되었고, 주변 지역과의 교류 역시 증대되어 대형 마을 유적이 형성되었다.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후기까지 대형 마을 유적이 여러 곳에 보이는데,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농경을 주로 하는 마을 유적이 다수 확인된다. 화성 지역의 대표적인 대형 마을 유적으로는 쌍송리 유적과 수영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수영리 유적이 충청 지역과의 교류 흔적이 엿보이는 유적이라면, 쌍송리 유적은 대형 환호로 상징되는 제의 시설로 보아 더욱 거점적인 역할을 수행한 마을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쌍송리 유적은 ‘Y’자형의 남북으로 연결되는 구릉 능선을 따라 북쪽과 남쪽 사면에 집자리가 각각 밀집되어 있다. 해발 70m의 구릉 정상부에는 평탄면을 둘러싼 환호 시설이 있으며, 남사면과 북사면에는 각각 10~20기의 집자리로 구성된 주거군이 자리하고 있다. 집자리는 평면 세장방형 3기, 장방형 33기 등 모두 36기이다. 가장 규모가 큰 26호 집자리의 크기는 길이 2,634㎝, 너비 400㎝이다. 초대형의 세장방형 집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중소형의 장방형 집자리가 다수 배치되는 양상이다. 특히 초대형에 해당하는 북쪽 주거군의 26호 집자리는 구릉 정상부 환호 출입구에서 바로 조망되는 위치라서, 마을 공동체의 지도자가 거주하였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
환호 시설의 평면은 원형 고리 모양으로, 지름 약 35m, 최대 너비 약 4.0m, 전체 둘레 약 90m이다. 환호로 둘러싸인 구릉 정상부는 조망권이 좋으며, 경관 측면에서 흔히 제의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삼한(三韓) 소도(蘇塗)의 기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릉 정상부의 환호로 둘러싸인 제의 공간에서 공동체의 집단 제의를 주도하며 마을 구성원의 결속을 도모하던 청동기 시대 지역 거점 마을의 현장을 잘 보여준다.
출토 유물의 구성은 환호와 집자리가 거의 비슷하다. 특히 세장방형 집자리에서는 입술새김 구멍무늬 토기, 구멍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등의 토기류와 간 돌검, 간 돌 화살촉, 간 돌도끼, 숫돌 등의 석기류가 적지 않게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구조와 출토 유물의 양상이 청동기 시대 전기 단계에 유행한 것이어서 기원전 10~9세기경 유적으로 추정된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화성 지역 무덤 유적은 마을 유적에 비해 수가 매우 적다. 병점동에서 고인돌 4기가 확인되었는데, 구봉산[해발 102m]에서 서쪽으로 뻗은 구릉부 평탄면에 자리한다. 고인돌은 굄돌이 작거나 납작하여 덮개돌만 두드러져 보이는데, 덮개돌의 방향으로 보면 모두 황구지천의 물줄기와 나란하게 조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자연 숭배 사상과도 관련된다. 또한 모두 10m 내외의 간격으로 밀집 분포하고 있어 유대 관계에 있는 마을 공동체가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호 고인돌은 길쭉한 개석의 크기가 길이 230㎝, 너비 170㎝, 두께 60㎝이며, 납작한 굄돌을 사용하는 것이어서 전형적인 탁자식이나 개석식이 아닌 특이 형식 고인돌로 지목된다. 2~4호 고인돌은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모양으로 보아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되고 있다. 모두 3m 미만의 중소형에 해당한다. 병점동 고인돌군은 1호 고인돌을 중심으로 나머지가 배치되어 있는 양상으로 볼 수 있는데, 인근 마을 공동체의 지도자 무덤이자 농경 사회의 공동체적 기념물로 이해되고 있다. 병점동 고인돌군을 통해 청동기 시대에 화성 지역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첨단 금속 기술을 통해 정치체를 형성하다 : 동학산 초기 철기 시대 유적]
화성 지역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은 수가 많지 않다. 다만 환호 시설이 있는 마을 유적, 청동 유물이 부장된 무덤, 금속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청동기 거푸집 등을 통해 마을 공동체가 통합되어 정치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초기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동학산 유적이다.
동학산 유적은 동학산[해발 122m] 정상부와 사면부에 자리한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를 파괴하고 산 정상부를 넓게 에워싸며 조성된 3중 환호와 수혈[구덩이] 7기가 조사되었다. 3중 환호는 상당 부분 삭평되었으나, 일부 중첩 관계가 확인되고 있어 어느 정도 장기간에 걸쳐 시차를 지니면서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호의 규모는 지름 100m 내외로 대형인데, 최대 너비 2.5m, 최대 깊이 1.2m이다. 환호 북서쪽과 남쪽의 단절 구간이 출입구로 추정된다. 환호 내에서는 덧띠 토기 바리, 제기 모양 토기, 검은 간 토기 항아리 등의 토기류와 삼각형 돌 화살촉, 홈자귀, 검자루 맞추개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한편, 정상부의 북쪽 평탄면에 형성되어 있는 환호[2호] 근처에서 청동 끌을 주조하였던 활석제 거푸집 1매가 수습되었는데, 유적에서 청동기가 직접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 거푸집의 크기는 길이 13.4㎝, 너비 3.8㎝, 두께 1.9㎝이다. 거푸집에 새긴 청동 끌은 길이 9.0㎝이며, 기원전 3세기경으로 편년되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 따라서 유적의 연대 역시 기원전 3세기 무렵으로 판단된다.
대형 환호로 둘러싸인 제의 공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청동기 거푸집이 환호 근처에 폐기된 점에 근거하여 볼 때, 청동기의 생산 소비 과정에서 마을 구성원이 참여하는 집단 제의 행위가 있었음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동학산 주변 지역에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 반경 수㎞ 내의 여러 마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운영한 제의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첨단 금속 제작 기술을 독점한 집단을 중심으로 정치체가 형성되어 간 정황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학산 유적은 화성 지역 집단들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형성하며 마한 정치체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배경 또는 과정을 짐작하게 해준다.
['통합-교류-첨단 기술'의 네트워크 : 선사 시대 문화 자원으로 화성의 미래를 말하다]
화성 지역 선사 시대 유적은 적지 않게 확인되었으나, 대부분 개발 사업으로 인한 구제 발굴이었다. 따라서 현장 보존이나 이전 복원 등의 보존 조치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화성 지역 주요 선사 유적은 학술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교육 자료로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를 전후하여 화성 지역에서 급증하는 마을 유적은 주변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었던 화성 지역 선사인의 삶을 반영한다. 화성 지역 선사 문화 자원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효율적인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들에 대한 재인식이 요구된다.
먼저 ‘화성역사박물관’ 등의 유관 기관을 통해 체계적인 홍보를 하고, 화성 지역 선사 문화 자원을 교육 자료로써 재구축할 필요성이 있다. 화성 지역 조사 자료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구석기 시대[오산리-청계리 등]-신석기 시대[석교리 등]-청동기 시대[쌍송리·병점동 등]-초기 철기 시대[동학산 등]’의 순서대로 교육 자료를 구성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이미 멸실되어버린 마을 유적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검증되어 일반화된 견해대로 전시 교육 시설을 제작하여야 하며, 지속적인 파괴 위기에 처해 있는 고인돌은 발굴 조사를 통해 학술적인 가치를 검증하여 완전하게 복원하여야 한다.
또한 화성 지역 선사 문화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화성 지역 선사 문화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강조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테면 구릉 정상부를 제의 시설로 활용하는 마을 유적들이 경기도 지역 내에서도 화성 지역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점은 ‘사회 통합’ 측면에서, 화성 지역과 충청도 지역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송국리식 집자리나 관련 유물들이 확인되는 점은 ‘대외 교류’ 측면에서, 경기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굴 조사를 통해 청동기 거푸집이 확인되었다는 점은 ‘첨단 기술’ 측면에서 각각 화성 지역 선사 문화의 세계사적 보편성과 지역사적 특수성을 잘 나타내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화성 지역 선사 문화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시적인 유적 공원과 박물관을 연계한 교육·관광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하다. 가령, 고속 도로변의 휴게소나 쉼터 및 주택 단지 주변 녹지 공간을 유적 소재지를 중심으로 조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다만, 화성 지역의 역사성이 반영되어 있는 선사 문화 자원의 핵심 키워드는 ‘사회 통합-교류-첨단 기술’이란 측면으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선사 문화 자원의 효율적 활용은 화성 지역의 미래 지향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있어서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