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03
한자 干拓地陸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선아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조성된 간척지에 대한 이야기.

[개설]

화성 지역은 조선 시대 이후 연안지역에서 간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간척사업에 의해 내륙이 확장되며 해안선은 단조로워졌다. 6·25전쟁 이후에도 간척사업은 지속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남양방조제, 시화방조제, 화성방조제 등 국가 주도로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다.

[간척, 땅을 일구다]

화성 지역의 간척지 분포는 지도를 통해서 대략적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농업과학원 토양환경정보시스템 흙토람에서 제공하는 분포지형도와 표토토성도에 따르면, 화성시 연안지역의 경작지들은 대부분 해안평탄지에 분포하며, 표토의 토성은 해안저습지성 토양에 해당하는 미사질양토로 구성되어 있다.

미사질양토를 보이는 지역 중에는 현대에 들어와서 조성된 대규모 간척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910년대 오만분의 일 지형도에서 바닷가에 제방을 쌓아 논으로 개간한 곳의 토성은 어김없이 미사질양토로 나타나고 있다. 오만분의 일 지형도에서 화성시 지역을 보면, 해안과 접해있는 구릉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해안선에 크고 작은 제방이 축조되어 있으며 그 내부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땅은 제방을 쌓기 이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던 곳이다.

간척지는 지명으로도 확인된다. 화성시 일대에서 간척으로 조성된 논은 ‘방죽논’ 또는 ‘원안’으로 불렸다. 방죽논은 남양반도 일대에서, 원안은 조암반도를 비롯하여 발안천 일대에서 많이 쓰였다. 방죽논은 문자 그대로 방죽[防築]을 쌓아 조성한 논을 가리킨다. 구체적인 지역을 가리킬 때는 ‘안방죽’[남양읍 원천리]처럼 뒤에 논이 붙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선방죽들’[마도면 석교리·슬항리]처럼 뒤에 ‘들’이 붙는 경우도 많았다.

원안은 ‘언안’, 다시 말해 제방을 뜻하는 한자 ‘언(堰)’ 자에 내부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안’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지명이다. 원안 역시 구체적으로 한 경작지를 부를 때는 ‘낭개원안’[우정읍 석천리]과 같이 고유지명 뒤에 ‘원안’을 붙이기도 하나 ‘만경원’[우정읍 원안리]과 같이 고유지명 뒤에 ‘원’만 붙여서 쓰는 경우가 더 흔하였다.

간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양에 소금기가 많이 남아있는 논은 특별히 ‘개논’이라 하였다. 1960년대 이후 대규모 간척을 통해 조성된 간척지인 경우 ‘방죽논’이나 ‘원안’이라는 용어 대신에 간척지 자체로 불렸다.

[조선시대의 간척]

1910년대에 제작된 지형도에는 20세기 이전 화성시 연안지역에서 간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척지는 조성 시기나 유래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마도면 석교리슬항리 사이에 있는 선방죽은 약 185,000평에 달하는 간척지로, 두곡리, 석교리, 슬항리, 청원리, 해문리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던 땅이다.

선방죽은 1900년경 일본 육군이 목측법으로 제작한 지형도에서부터 확인이 되지만 땅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문헌에서 남아있는 조선 시대 간척 관련 정보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간척 면적의 광대함에 비해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 관찬 연대기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성 지역의 대표적인 간척지로는 삼수언(三水堰)이 있다. 『승정원일기』[영조 원년 7월 11일, 영조 3년 윤3월 17일]와 『영조실록』[영조 3년 윤3월 16일] 등의 기록에 따르면, 삼수언은 지금의 장안면 독정리·장안리 일대에 조성된 간척지이다.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수언은 궁방과 사복시(司僕寺), 백성들 간에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의 대상이 되었던 땅이다. 현재까지도 독정리에는 삼수문들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경기도각군소장(京畿道各郡訴狀)』 등 근대정부기록류에도 19세기 말~20세기 초 간척지 현황을 보여주는 기사가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간척지가 지금의 우정읍 원안리에 있는 만경언(萬頃堰)과 매송면 원리에 소재한 향탄둔(香炭屯)이다. 현재 만경원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는 만경언은 민간에서 조성한 간척지였다. 향탄둔은 국가에서 조성한 둔전으로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송동면 만평리(晩坪里)에 속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볼 수 있는 해일이나 수해, 염해 등 해안지역의 재해 관련 기사는 간척을 통해 저지대로 경지가 확대되고 거주지가 이동해갔던 사회상을 반영한다. 간척지가 많았던 화성지역 역시 해일, 풍수해, 염해 등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1669년 8월 23일자 『승정원일기』에 실린 경기감사의 서목(書目)에 따르면, 광주, 수원, 양성 등의 해변에 위치한 간척지가 해일로 땅이 떨어져 나가서 논농사에 큰 피해가 있었다.

1807년(순조 7) 봄에는 경기 남부지역에 큰 해일이 있었는데, 수원부의 경우 피해를 입은 지역은 20개 면에 달했으며, 염해를 입은 전답의 면적은 2,422석 18두락이었다. 1836년부터 1837년까지 약 2년 동안 수원유수로 재직했던 서유구(徐有榘)가 남긴 공무일기인 『화영일록(華營日錄)』 등에도 연안지역의 해일 피해와 이에 대한 구제책이 수차례 언급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간척]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간척은 통감부 및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간척은 1907년 7월에 제정된 「국유미간지이용법」의 규정을 받았으며, 1923년 3월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이 법령에 따라 진행되었다.

『관보』에는 두 법령에 따라 허가를 받은 3정보 이상 간척사업의 피허가인 성명과 주소, 간척 소재지, 면적 등이 기재되어 있다. 토지개량사업 보조를 받은 사업은 별도의 표기를 통해 토지개량사업 대상임을 밝히고 있다.

화성 지역에서 『관보』에 기재된 3정보 이상의 간척은 총 141건이다. 하나의 간척사업에 대해 매립면허, 이전허가, 연기허가, 준공인가, 효력소멸 등 여러 종류의 허가권이 존재하는데, 동일 간척지에 대한 허가사항을 하나의 건수로 환산하면 57건의 간척에 대한 허가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 토지개량사업의 보조를 받은 사업은 11건이다. 매립면허를 받은 뒤 간척공사를 완료하여 준공인가를 받은 사업은 17건으로, 면적은 약 3,600,000평이다. 준공 면적이 1~10만 평이 되는 사업이 8건, 10~20만 평 사업이 5건, 20~30만 평 사업이 2건, 40~50만 평 사업이 1건, 60~70만 평 사업이 1건, 80~90만 평 사업이 1건이다.

화성지역 토지개량사업과 관련된 문서는 국가기록원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5개의 사업에 대한 8개의 기록물철이 보관되어 있다. 이 중 4개 사업이 간척사업에 대한 것으로, 팔탄면 노하리·하저리남양읍 온석리·무송리 일대의 간척지, 우정읍 주곡리장안면 석포리 장안농장, 우정읍 여산 송씨 집안의 간척지, 장안면 방농장 등에 관한 문서가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간척지 중 화성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간척지는 방농장이다. 장안면 석포리팔탄면 노하리에 소재한 방농장은 『조선일보』 설립자인 방응모가 조성한 간척지이다. 『관보』에 따르면 방응모는 1931년 8월 3일 장안면·팔탄면 일대의 간석지 966,000평을 1935년 12월 말까지 매립하는 조건으로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후 1935년 11월과 1938년 2월에 연장허가를 받아 1938년 11월 29일에 준공인가를 받았다. 석포5리 방농장 마을은 새 간척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정착하여 조성한 간척촌이다.

[해방 이후~1960년대의 간척]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간척사업은 제도적 정비 없이 진행되어오다가 1962년 「공유수면매립법」이 제정되면서 법적·제도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공유수면매립법」의 제정 이전에도 화성 지역에서는 주민들에 의한 소규모 간척이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은 소규모 간척지 중에는 국가로부터 매립면허권을 받지 않고 농지를 조성하여 경작해오다가 1960년대에 추인을 받은 곳들도 많이 있다.

1950~1960년대에는 소규모 간척뿐만 아니라 수십만 평 규모의 대규모 간척도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 대규모 간척은 미국의 원조 식량을 기반으로 한 국가의 농촌정착사업이 주도하였다. 1950년대 초 국가는 난민정착사업의 일환으로 간척사업을 권장하였으며,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농촌정착사업의 대상에 난민뿐만 아니라 도시 부랑아, 실업자, 고아 등 사회 취약계층을 포함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농촌 개발의 논리가 전면적으로 부각되면서, 농촌정착사업은 지역민의 자조와 자활을 목표로 하는 자조근로사업으로 흡수되었다.

1950~1960년대 화성지역 간척 관련 문서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1950년대 생산된 문서철은 6건, 1960년대 문서철은 51건이다. 문서철에 기록된 준공인가 건수는 총 32건이며, 총 매립 면적은 1,081,429평이다. 매립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보면 답이 15건, 염전이 15건으로 건수는 동일하나, 염전 면적이 924,225평으로 답 면적의 8배 이상이 된다.

신청자의 대다수는 화성군 관내 거주자로 대부분 매립지가 있는 동리에 거주하였다. 1950~1960년대 조성된 대표적인 간척사업은 서신면 매화리 공생염전이다. 1953년 철의삼각지난민자치공생조합에서 착공한 이 사업은 1960년 10월 준공되었으며, 간척 면적은 267,642평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받은 사업장 중에는 준공인가를 받지 못하여 면허가 취소된 사업들도 다수 존재한다. 국가기록원 소장 문서에서 1960년대 간척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사업 건수는 14건이며, 면적은 15,235,590평으로 이 시기 준공 면적의 약 14배에 달한다. 이 중에는 남양간척지 전신인 이기창의 화성농장도 있는데, 매립 규모가 7,590,000평으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1970~1990년대의 간척]

1970~1990년대는 대단위 농지개발을 목적으로 한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화성시에 있는 남양간척지와 시화·화옹지구는 이 시기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의 기념비적이고 상징적인 사업들이다.

1960년대 초반에 계획되어 1970년대 들어와 완공된 남양간척지는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의 시발점일 뿐만 아니라 원조경제에서 차관경제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의 전환기에 국가가 취했던 간척사업에 대한 정책 변화를 보여주는 사업이다.

대청댐 수몰민들의 이주지로 계획되어 민간사업자에 의해 추진되어오던 남양간척지는 1970년에 정부 산하 농업진흥공사에 인수된 후 IBRD 차관에 의한 금강평택지구 전천후농업용수개발사업에 편입되었다. 남양방조제는 발안천 하구를 막아 조성되었다. 방조제 길이는 2.07㎞이며, 내부 개답 면적은 2,279㏊이다. 방조제 공사는 민간사업자에 의해 1964년 시작되었으나 1970년 농업진흥공사가 인수하여 1973년 12월 완공하였다.

농업진흥공사는 내부 개답과 기반시설 조성까지 맡아서 진행하였는데, 이 작업은 1976년까지 계속되었다. 남양간척지 조성과 함께 정부는 신규 촌락을 조성하여 이주민들을 정착시켰다. 이에 따라 화성 지역에는 장안면에 6개 촌락이 새로 들어서게 되었다. 노진3리, 덕다3리, 독정4리, 사곡5리, 장안5리, 장안7리는 당시에 조성된 마을이다. 장안면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일반 공모자, 서울시 철거민, 국가보훈대상자, 반공청년회 소속의 사람들이었으며, 대청댐 수몰민은 평택지역에 정착하였다.

화성지역의 해안선을 극적으로 바꾼 시화지구와 화옹지구는 1987년과 1991년에 착공되었지만, 개발계획은 1975~1976년에 추진된 서남해안간척농지개발을 위한 예비조사 당시부터 개발지구에 포함되었다. 서해안간척사업의 시범적 사업으로 계획된 시화지구는 공업단지 및 도시 개발, 대단위 농지조성과 관개 개선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시흥시 정왕동과 안산시 대부도를 잇는 시화지구는 1987년 6월 방조제 공사에 착공하여 1994년 1월 끝막이 공사를 완료하였다. 방조제 길이는 12.6㎞이다.

화성시에서는 서신면, 송산면, 남양읍 북부 연안지역이 시화지구사업의 영향을 받았다. 화옹지구는 농지 확장, 수자원 개발 및 농가 소득 증대, 연륙(連陸) 개선 및 해안선 단축을 목표로 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 서신면 궁평리우정읍 매향리를 잇는 화성방조제는 1991년 9월에 착공하여 2002년 3월에 완료되었다. 방조제 길이는 9.81㎞이다.

시화지구와 화옹지구는 1970년대부터 추진되어왔던 국가 주도 간척사업이 절정에 다다른 사업의 하나이면서도 대규모 간척에 따른 환경오염 및 보상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킨 사업이기도 하다. 시화지구와 화옹지구는 현재까지 개발 중에 있으며 내수면 관리와 토지 이용을 둘러싸고 한국농어촌공사와 경기도 사이에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다.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가지고 왔던 대규모 간척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 산물인 내수면과 토지를 어떻게 이용하고 관리할 것인가는 지역사회와 국가가 함께 풀어가야 할 지속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 화성의 간척지]

2002년 화성방조제가 완공된 이후, 시민 단체들은 화성호의 수질문제, 간척지 활용 문제 등에 대한 조사와 제안을 계속 진행하였다. 2006년에 ‘화성호살리기시민연대’를 결성하여 화성호 내 수질 개선 방법과 조류 보호 대책의 수립을 요구하였고, 화옹지구 간척사업 반대 토론회, 화성시민 서명운동 등 시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화성시민들은 남양호의 상류 하천인 발안천의 수질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발안천 생태 하천 복원이 진행되었다. 화성의 환경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2005년의 ‘발안천 문화제’를 개최하고, 2006년에 ‘발안천 살리기 협회’를 구성하는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