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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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光斗 |
영어공식명칭 | Noh Gwangdu |
이칭/별칭 | 청지,감모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출생 시기/일시 | 1772년 11월 18일 - 노광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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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4년 - 노광두, 식년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19년 - 노광두, 전적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20년 - 노광두, 지평·이조좌랑 등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26년 - 노광두, 자인현감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51년 - 노광두, 호조참판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859년 - 노광두 사망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촌 |
거주|이주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남효동 |
거주|이주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촌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풍천(豊川) |
대표 관직 | 자인현감|우부승지|호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의 문신.
[가계]
노광두의 자는 청지(淸之), 호는 감모재(感慕齋), 본관은 풍천이다. 노광두(盧光斗)[1772~1859]의 할아버지는 노정국(盧楨國),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노석규(盧錫奎)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 박내오(朴來吾)[1713~1785]의 딸이다.
[활동 사항]
노광두는 1772년 11월 18일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촌에서 태어났다. 1783년(정조 7) 13세 때 함양군 지곡면 남효동(南孝洞)으로 이주했으나 4년 뒤 다시 개평촌으로 이주하였다. 노광두는 과거 급제 후 1819년(순조 19) 전적(典籍)[조선 시대 성균관에 속하여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 보던 정6품 벼슬]이 되었고, 1820년 겨울 사직서령(社稷署令)으로 지평(持平)[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헌종이 즉위한 뒤 장령이 되어 여러 경전의 절실한 말과 소학의 1·2장을 추려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경연에 사용하기를 원하는 소를 올린 바 있다. 소가 올라가자 대왕대비가 노광두를 우부승지에 임명하였다. 이후 관직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노광두 말년에는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에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족인(族人) 노광리(盧光履)와 함께 부친이 남긴 좋은 글을 요약하여 「가학십도(家學十圖)」를 만들었다. 「가학십도」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모방한 것이었다. 1859년(철종 10) 병으로 몸져 누었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향년 88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노광두의 문집으로 『감모재집(感慕齋集)』이 있다.